李應瑞
應瑞1891. 8. 23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참의부
- · 조선혁명군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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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8) 1891년 8월 23일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읍내면(邑內面) 동부동(東部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파(白波)이고, 이명으로 백옥산(白玉山)·이송갑(李松甲)·이춘(李春)·이춘산(李春山) 등을 사용하였다. ‘국경 방면의 흑선풍(黑旋風)’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9세부터 15세까지 고향에서 한문을 배웠고, 17세 때 강계군 공북면(公北面) 사립 협신사범학교(協新師範學校)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20세 때 수원농림전문학교(水原農林專門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중도 퇴학하였다. 이후 청림교(靑林敎)에 입교하여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청림교 강계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30세까지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였고, 인제의원(仁濟醫院)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23년 남만주 펑톈(奉天)으로 이주하였다. 같은 해 9월 10일 ‘산업자금을 융통한다’는 명분으로 만주흥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회사 주식을 모집하는 형식으로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지린성(吉林省)으로 가서 길장선(吉長線) 연선(沿線)의 한형기(韓亨基) 집에서 한족회(韓族會) 회원 이백우(李白于)의 권유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민적위원(民籍委員)이 되었다. 1924년 (음)2월 지안현(輯安縣) 유수림자(楡樹林子)에서 참의부(參議府)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을 만나 참의부에 참여하였다. 이후 제1중대 소대장 겸 군의(軍醫), 지정병원 감독, 통남지방(通南地方) 총관특파원(總管特派員), 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음)4월 참의부 소대장 장창헌(張昌憲), 대원 이정빈(李正斌)·이창화(李昌華)·김용화(金用化)·박지용(朴枝用) 등과 강계군 화경면(化京面) 이만동(梨滿洞) 최시화(崔時化)의 집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그 해 6월 21일 밤 김여련(金汝璉)·차천리(車千里) 등과 강계군 곡하면(曲河面) 쌍부동(雙富洞) 자위단원(自衛團員) 백봉기(白鳳琦)의 집에서 아들 백봉빈(白鳳濱)을 처단하고 방화하였다. 1924년 7월 1일 강계군 이서면(吏西面) 등공동(登公洞)에서 만포경찰서(滿浦警察署) 소속 일제 경찰 2명을 처단하였다. 7월 13일 오전 1시 김여련·차천리 등 10여 명과 공북면 향하동(香河洞) 밀정 김용준(金用俊)의 집에서 그의 처 김응여(金應汝)를 처단하고 방화한 다음, 같은 마을의 친일행위자 김봉서(金鳳瑞) 집도 방화하였다. 7월 14일 장창헌 외 3명이 일제 경찰에 사살된 후 김여련과 만주로 탈출하였다. 1924년 8월 참의부 군의 겸 소대장으로 김여련·차천리·김석홍(金碩弘)·현성희(玄成熙)·강효걸(姜孝杰)·김천일(金天日)·김선택(金善澤)·전창식(田昌植)·조원묵(趙元默)·엄태수(嚴泰洙)·김석수(金奭洙)·김진(金振) 등 14명과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강계군으로 가서 배상태(裵相太)·송선호(宋善鎬) 등 5명과 합류하였다. 1924년 8월 22일 오후 8시 강계군 고산면(高山面) 연산동(延山洞)에서 친일행위자 김오규(金五奎)와 김정수(金井洙)의 집에 방화하였다. 8월 29일 강계군 종서면(從西面) 황서동(黃西洞)에서 김여련·손용준(孫用俊)·박학빈(朴學彬) 등 20명과 장창헌 등이 사살된 사건에 관련된 밀정 이정호(李貞浩)·이도현(李度鉉)·김성로(金成魯)·한승항(韓承恒)을 처단하였다. 또한, 밀정을 도와준 양신도(梁信道)·김기주(金基周)·김석구(金錫九)·김창호(金昌浩)·원성근(元成根)·백선학(白善學)·김순일(金淳一)·차사현(車士賢)·김봉순(金鳳淳)·하영삼(河永三)·김용준 등의 집에 방화하였다. 1924년 9월 4일 손용준·차천리·강효걸·김천일 등과 강계군 이서면(吏西面) 산중에서 밀정 혐의가 있는 박명호(朴明浩)·전호용(田虎庸)·방정욱(方貞郁)을 체포하였고, 9월 5일 박명호를 처단하였다. 9월 28일 오전 1시 동지 7명과 공북면 항강동(香江洞)에서 밀정 지성룡(池成龍)을 처단하였다. 강계군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귀환하던 중, 평북 위원군(渭原郡) 위송면(渭松面) 석포동(石浦洞)에서 김여련을 만나 10월 6일 이명구(金明九)의 집 부근 골짜기에서 밀정 이찬봉(李贊鳳)을 처단하였다. 1925년 4월 진동도독부(鎭東都督府) 사령부 제3사령 참모로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지린성(吉林省) 아성현(阿城縣)에서 최주영(崔柱英)·김관우(金寬禹)·강익찬(康益贊)·최종연(崔鍾淵)·김원상(金元相)·최의산(崔義山)·윤해도(尹海道) 등과 “독립운동의 급진(急進)을 촉(促)함”이라는 강령 아래 한국혁명군을 조직하고 사령에 선임되었다. 톈진(天津) 영국 조계(租界)에서 신태흥양행(新泰興洋行)을 경영하는 박도일(朴道一)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최주영 등을 파견하였으나, 실행 준비 중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6년 (음)4월 지린성 이도하자(二道河子) 유해강(劉海崗)의 집에서 조선혁명군대본영(朝鮮革命軍大本營)을 조직하였다. 1928년 8월 강계군 간북면(干北面) 소승곡(小僧谷)에서 친일행위자 김명수(金明洙)를 처단하였다. 그러던 중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계 과장 김덕기(金德基)가 파견한 밀정의 계략에 빠져 1929년 4월 신의주 여관에서 평북 경찰부 순찰계 경부 계난수(桂蘭秀)에게 붙잡혔다. 신의주경찰서에서 조사받은 후 5월 21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넘겨졌다. 1930년 11월 24일 예심이 종결되었고,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살인, 방화죄 등을 이유로 김여련·손용준·최봉우(崔奉祐)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들의 ‘범행 건수’를 “살인 43건, 방화 30건, 우편물 강탈 6건, 전신 절단 7건, 경찰과 교전 6건, 군자금 36,290원 모집 등 총 217건”이라며 대서특필하였다. 1931년 7월 2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항소하였다. 10월 1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공판이 진행되었고 노진설(盧鎭卨) 변호사가 무료변론에 나섰으나, 같은 해 12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도 무기징역을 받았다. 1932년 3월 14일 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는 과정에서 탈옥을 준비하였다. 이 계획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1924년 9월 중순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당시 참의부 참사인 현성희(玄成凞)가 1922년 강계군 공서면 송파동(松坡洞) 산중에 폭탄 60여 개를 숨겨 두었다는 사실을 일제에 알린 후 현장 확인을 위해 그를 강계로 이동시키면, 이미 1933년 2월 23일 풀려난 변창우(邊昌祐)가 동지를 규합해 그의 탈출을 돕기로 계획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일제에 발각되어, 1934년 1월 30일 경성형무소에서 일제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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