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順模
順模1893. 2. 25 ~ 1975. 5.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1919년 수원군 장안면
- · 우정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3년 2월 25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현 화성시) 장안면(長安面) 수촌리(水村里)에서 태어났다. 1920년 판결문에는 6월 2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이경호(李景浩)이다. 14~15세부터 3~4년간 천자문(千字文)·동몽선습(童蒙先習)·통감(通鑑)·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을 배웠다. 농업에 종사하였고, 천주교인이었다. 1919년 4월 3일 수원군 장안면과 우정면에서 전개되었던 만세시위를 계획·주도하면서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를 처단하였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장안면 지역에서는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움직임이 3월 말부터 있었다. 3월 29일 차한걸(車漢傑)과 함께 우정면(雨汀面) 화수리(花樹里) 소재 경찰관주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순사보(巡査補) 오인영(吳麟泳)을 찾아가,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면 제지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3월 30일 장안면 인근 쌍봉산(雙峯山)에서 오인영을 비롯해 우정면 매향리(梅香里)의 백남균(白南均), 석천리(石川里)의 김재식(金在植), 조암리(朝岩里)의 김문명(金文明), 화산리(華山里)의 기봉규(奇鳳奎), 장안면 독정리(篤亭里)의 우영규(禹英圭), 수촌리의 백남열(白南烈)·홍순근(洪順根), 장안리(長安里)의 최성학(崔成鶴) 등과 회합하였다.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만세시위를 실행하기 위해 면사무소·경찰관주재소 방화반과 일본인 순사 처단반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집집마다 전달하여 모두 몽둥이를 들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차희식(車喜植)·김흥식(金興植)·장소진(張韶鎭)·장제덕(張濟德) 등이 가세하여 참여자들을 확보하였고, 석포리(石浦里) 구장 차병한(車炳漢)과 그 일가인 차병혁(車炳赫) 등 지역 인사도 동참하였다. 4월 2일 장안면 14개 곳의 산에서 횃불만세시위가 거행되어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4월 3일 수촌리 구장 백낙열(白樂烈)의 사환 이원준(李元俊)이 아침 일찍부터 집집마다 돌며 몽둥이를 가지고 장안면사무소 앞으로 모일 것과 모두 참여할 것을 전파하였다. 같은 날 오전 10시경 장안면 어은리(漁隱里) 소재 장안면사무소 앞에 모인 200여 명의 주민들을 인솔하였다. 이 자리에서 차병혁·차병한의 설득으로 장안면장 김현묵(金賢黙)이 연설을 하고 주민들을 독려하며 만세를 선창하였고, 이를 따라 외치며 장안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이때 장안면사무소 공격의 선두에 서서 유리창과 외벽 등을 부수고, 내부의 탁자와 의자 등 집기류와 서류를 면사무소 앞마당으로 가지고 나와 불태웠다. 오전 11시 경에는 주민들을 인솔해 인근 쌍봉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합류한 장안면 수촌리·석포리·어은리, 우정면 주곡리(珠谷里)의 주민 약 1,000여 명과 더불어 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후 3시경에는 다른 주도인물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쌍봉산에서 내곡리(內谷里)·조암리·일원리(逸院里)를 거쳐, 약 3.5km 떨어진 우정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우정면사무소에 도착하자 이봉구(李鳳九)와 함께 가장 먼저 면사무소 현관 입구의 유리창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다른 시위대도 적극 합세하였다. 오후 3시 30분경에는 다시 주민들을 이끌고 우정면 화수리에 위치한 화수경찰관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우정면사무소에서 약 3km 떨어진 장안면 한각리(閑角里)에 이르자, 시위대를 두 개의 대열로 나누었다. 한 대열은 오른쪽 솔밭 언덕을 넘어 동쪽으로, 나머지 대열은 왼쪽 우정면 판정리(板井里) 쪽으로 전진하여 오후 5시경 화수리에 집결하였다. 약 2,000~2,500명으로 증가한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를 포위한 이후 창문과 담장을 부수고, 뒤쪽에 불을 놓아 소각하였다. 이 과장에서 시위대를 저지하던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가 권총을 발포해 화수리의 김만우(金萬友)와 장안면 사곡리의 이경백(李敬伯) 등 3명이 쓰러졌다. 그러자 만세시위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격앙되었고, 가와바타가 도주하자 격분한 사람들이 추격하였다. 정서송(鄭庶松)이 먼저 쫓아가 가와바타를 쓰러뜨리고 허리와 다리부위를 몽둥이로 내리쳤다. 이어서 다른 시위대와 함께 합세하여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가 지정되었다. 같은 해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살인방화죄 등으로 징역 10년(미결구류일수 중 4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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