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李奉昌1901. 8. 10 ~ 1932. 10. 1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인애국단
포상 정보
- · 대통령장(1962)
관련 사건
- · 일왕 처단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장(1962) 1901년 8월 10일 경성부 원정 2정목(京城府元町 2丁目, 현 원효로 2가)에서 아버지 이진구(李鎭球)와 어머니 손씨(孫氏)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금정(錦町, 현 효창동)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이명으로 기노시타 쇼죠(木下昌藏), 마쓰이 가즈오(松井一夫),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를 사용하였다. 1911년 8세 때 다니던 서당을 그만두고 사립 문창학교(文昌學校)에 입학, 1915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가계를 돕고자 일본인이 운영하던 과자가게 와다에세도(和田衛生堂)에서 점원으로 일하였다. 1년 후 보다 많은 수입을 얻기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약국으로 직장을 옮겼다. 1919년 8월에는 약국 일을 하다가 알게 된 일본인 단골의 소개로 용산역의 시용부(試傭夫)로 취직하였다. 처음 1년 동안 시용부에서 역부(役夫), 전철수, 연결수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어느새 일본인들의 빠른 승진에 밀리게 되었고, 직장 내에서 느낀 민족 차별과 차등 대우로 힘들어하다 1924년 4월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이후 1년 반 동안 관왕묘(관우 사당) 보존 운동에 참여하고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 자치부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간이 국세 조사의 조사 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일본에 가면 차별 대우도 없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1925년 11월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갔다. 직업소개소를 통해 일자리를 찾았지만 쉽사리 구하지 못하다가 1926년 2월 오사카 가스 회사 상용 인부로 취직하였다. 이때부터 일상 생활의 편의를 위해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간사이(關西) 공업학교 야학부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하였다. 그렇지만 각기병으로 일도 학업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요양을 하면서 지인의 가게를 돕다가 1927년 5월 가스 회사로 복직했지만 오래 가지 않았고 부두에서 석탄 짐꾼으로 일하였다. 이곳에서도 민족 차별을 겪고 그만둔 후 1928년 2월 구리 제련 공장인 스미토모 신동소(住友伸銅所) 아마가사키(尼)ケ(崎) 출장소에 상용 인부로 취직하였다. 그 해 11월 히로히토(裕仁) 일왕(日王)의 즉위식을 구경하러 친구 2명과 함께 교토(京都)에 갔다가 한글이 섞인 편지를 지참했다는 이유로 예비검속에 걸려 9일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오사카와 고베(神戶) 일대에서 막노동을 하였으나 끊임없는 민족 차별에 괴로워하다 1929년 9월 도쿄(東京)로 이동하였다. 도쿄에서 마쓰이 가즈오(松井一夫)라는 새로운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며 일자리를 전전했으나 심각한 불경기 속에서 생활은 더욱 악화되었다. 1930년 11월 다시 오사카로 돌아갔다. 지인에게 중국 상하이(上海)에 가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교민단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제는 떳떳하게 한국인으로 살겠다는 마음으로 12월 상하이로 건너갔다. 1931년 1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의 임시정부를 찾아가 김동호(金東浩)를 만났다. 자신의 경력을 소개하며 철도 관련 일자리 주선을 부탁했지만 영어나 중국어를 못 하면 취직이 힘들다며 거절당하였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명선(明善) 철공소에 대장장이로 취직한 후 4월경 다시 임시정부를 찾아갔을 때 김구를 만났다. 김구로부터 임시정부의 주의, 강령 등을 듣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후 때때로 만나면서 더욱 이 생각을 굳히게 되었고 폭탄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일본으로 가서 일왕(日王)을 죽이고 한국의 독립을 촉진시키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았고, 김구는 가능한 한 후원하겠다고 답하였다. 8월 말쯤 철공소를 그만두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악기점 점원으로 일하며 일본인 행세를 하였다. 그동안 김구는 자금과 폭탄을 준비하고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결성하였고, 12월 6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이봉창의 일왕(日王) 폭살 계획을 보고하고 승인을 얻었다. 1931년 12월 13일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의 첫 단원으로 가입하였다. 김구로부터 폭탄과 자금 300달러를 건네받고 나서, 양손에 1개씩 폭탄을 들고 선언서를 가슴에 걸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12월 17일 일본 우편선 히카와마루(氷川丸)에 승선하여 19일 일본 고베항에 도착한 후 바로 오사카로 갔다. 사흘 후 22일 도쿄로 갔다. 12월 28일 신문 기사에서 1932년 1월 8일 요요기(代々木) 연병장에서 열리는 육군 열병식에 일왕(日王)이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날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심하였다. 경비 부족으로 고생하다가 1월 4일 김구가 보내준 100엔을 찾고 1월 8일로 거사일을 정했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1월 6일 사전 답사차 예행연습이 진행되고 있던 요요기 연병장을 찾았지만 생각보다 너무 넓어 거사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일왕(日王)이 연병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신분 노출을 우려하여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라는 새로운 일본식 이름으로 숙소를 옮기고 폭탄을 넣어 운반할 엿 상자를 사두었다. 1월 8일 오전 8시 숙소에서 나와 연병장으로 향하였다. 들어가는 길목을 노렸으나 삼엄한 경비와 정확한 이동 경로를 파악하지 못해 나오는 길에서 거행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몇 번의 장소 변경 끝에 모든 일정을 마치고 궁성으로 들어가려고 사무라다몬(桜田門) 쪽으로 다가오는 일왕(日王)의 행렬을 경시청 정문 앞에서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일왕(日王)이 타고 있다고 생각한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45분이었다. 하지만 그 마차에는 일왕(日王)이 아니라 궁내부 대신이 타고 있었고 폭탄도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경시청으로 연행되었다.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차단된 채 동경지방재판소 검사의 취조를 받았다. 검찰은 형법 제 73조의 ‘대역죄’에 따라 최고 재판소인 대심원에 예심을 청구하였다. ‘대역죄’란, “국가나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로, 일본 왕실에 위해를 가한 행위뿐 아니라 모의나 계획 등 예비 행위만으로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것”이었다. 9월 16일의 공판에서 사형을 구형 받았고, 170여 명의 방청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9월 30일의 선고 공판에서도 사형을 받았다. 사형을 선고받은 지 불과 열흘 만인 10월 10일 도쿄의 이치가야(市ケ谷)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유해는 사이타마현(埼玉縣) 우라와시(浦和市)의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매장되었다. 광복 후 재일한인 단체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은 그의 유해와 가나자와(金澤)의 윤봉길(尹奉吉), 나가사키(長崎)의 백정기(白貞基)의 유해를 찾아 본부에 모셔두었다가 한국으로 봉환하였다. 1946년 6월 15일 김구는 부산에 도착한 세 의사의 유해를 맞아 해방자호(解放者號) 열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였다. 그 해 7월 7일 국민장을 치르고 효창원(孝昌園)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배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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