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善稙
善稙1897. 12. 3 ~ 1930. 7.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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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2) 1897년 12월 3일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하다면(何多面) 송파리(松坡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이선식(李善植)과 한자를 달리한 이선직(李善直)을 썼다. 1930년 일제 삼림조합의 부당한 처우에 항거하였다. 1930년대 함남 단천군 주민들의 주요 생계수단은 땔나무와 숯을 만들어 파는 것이었다. 임야는 그곳 군민들에게 중요한 생존수단이었다. 일제는 강압적으로 삼림조합(森林組合)을 만들어 주민들이 자기 소유의 산인데도 불구하고 나무도 채취하지 못하게 되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산림정책을 실행하고 삼림자원을 감시할 목적으로 경찰력과 행정력을 동원하여 강제적으로 삼림조합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삼림조합이 군단위 조합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군민들은 나무를 채취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과도한 조합비까지 부담하게 되었다. 또한 일제 삼림조합 간수들의 행패는 더 심해졌으며, 군민들은 생존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930년 7월 단천군 하다면 연대리(蓮坮里)에서 삼림조합 간수가 삼림 단속 중 연대리 주민 허달규(許達圭)를 도벌 혐의로 취조하려다 허달규의 부인을 구타하고 감금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분노한 군민 200여 명과 함께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가 면사무소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인식하고 7월 18일 단천군청으로 항의하러 가서 일제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시위대는 일제 경찰이 “해산하면 잘 처리하겠다”고 회유하여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 주도자 20여 명을 검거하는 등의 탄압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에 격분한 주민 400여 명과 함께 7월 19일 단천군청으로 찾아가 군수와의 면담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일제 경찰의 위협에 또다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하다면·복귀면(福貴面)·파도면(波道面)의 농민들과 함께 군민대회가 개최되어 일제의 강압적인 삼림조합의 해체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7월 20일 군민 2,000여 명과 함께 단천군청 앞에 모여 군청을 습격하고 단천경찰서로 가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제 경찰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군중들을 향해 발포를 하였다. 이때 일제의 무차별 발포로 총격을 입고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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