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昇翼
昇翼1875. 12. 20 ~ 1946. 12. 2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5)
관련 사건
- · 1919년 3월 양주군 이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5) 1875년 12월 20일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미금면(渼金面) 평내리(坪內里, 현 남양주시 평내동)에서 태어났다. 한자가 다른 이름으로 승익(升翼)을 사용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마을의 구장(區長)이었으며, 정기섭(丁基燮)·우보현(禹輔鉉)·이석준(李錫俊)·이보영(李輔永) 등과 함께 3월 13일부터 14일까지 2일 간 전개된 양주군 미금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평내리의 구장이었으나,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과 나라의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고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3월 1일 이래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이에 공감하여 기회가 되면 만세운동에 참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3월 중순경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만세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행정망을 통해 전국에 「유고문(諭告文)」을 배포하였다. 이는 각 마을의 구장들에게까지 전달되었다. 그 내용을 읽어보니, 독립을 희망하는 한국인으로서 동의할 수 없고, 오히려 분노를 자극하는 내용이었으나, 오히려 「유고문」을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던 만세운동의 기회로 이용하기로 계획하였다.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유고문」의 내용을 읽어주면, 주민들의 분노가 자극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만세운동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3월 13일 아침, 마을 주민들에게 「유고문」의 내용을 알려야 하니 모두 평내리 주막으로 모이라고 통지했다. 이에 10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이 주막으로 왔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모이자, 조선총독의 「유고문」을 주민들 앞에서 읽어 내려갔다. “주민들은 쓸데없는 유언비어에 열중하여 되지도 않은 일에 광분하지 말라. 일본제국은 전승국이므로 한국의 통치에 관해서는 조금도 변경의 여지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예상대로 주민들의 분노가 표출되었다. 정기섭·우보현 등의 주민들이 「유고문」 대독에 야유를 보내고, “우리는 만세를 부릅시다”라고 다른 주민들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공감한 100여 명의 주민들이 다같이 ‘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외쳤다. 기다리고 있던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이를 제지하지 않고, 곧바로 주민들의 선두에서 시위대를 지휘하였다. 만세시위는 다음날인 14일까지 이어졌다. 이날 아침 전날의 만세시위를 함께 했던 주민들을 비롯하여 더욱 늘어난 150여 명의 시위대를 지휘하여 평내리에서 큰 목소리로 일제를 규탄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만세시위를 한동안 전개한 뒤, 금곡리(金谷里)의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만세 행진 도중 일본인 도비타 린키치(飛田林吉)가 시위대를 가로막고 해산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석준과 함께 “2,000만 동포가 조선의 독립을 기뻐하여 만세를 부름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반박하고, 계속하여 만세시위 행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날의 만세시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도비타의 신고로 일제 헌병대가 출동하여 폭력적으로 진압함에,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 해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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