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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信

相信

1888. 5. 5 ~ 1961.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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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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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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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8년 5월 5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죽백리(竹栢里, 현 평택시 죽백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흥도(李興道)이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양성면(陽城面)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안성군 원곡면·양성면 만세운동은 칠곡리(七谷里)의 이유석(李裕奭)과 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의 이양섭(李陽燮) 등이 주도하여 원곡면과 양성면 두 지역 주민들이 연합하여 전개한 운동이었다. 이 두 지역에서는 3월 28일부터 4월 초까지 연일 만세시위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4월 1일 오후 이양섭으로부터 이날 밤 면사무소 앞에서 새로운 만세시위가 진행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는 원곡면의 각 마을에서 약 1,000명의 주민들이 참여하여 높은 열기 속에서 전개되었다. 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여 이양섭 등의 지휘에 따라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을 면사무소 밖으로 끌어내어 그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이에 면장 남길우 이하 면사무소 직원들은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만세시위에 대한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양섭 등 주도자들은 이 기세를 몰아 일제의 경찰주재소, 우편소와 양성면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양성면으로 행진하여 양성면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양성으로 가자’라는 주장에 호응하여 횃불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양성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성은고개의 정상에 도달하자, 이양섭 등의 주도자들은 행진을 일단 멈추고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유석이 먼저 시위대 앞으로 나와 “여러분 우리가 서로 기약 없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니, 우리는 양성주재소로 가서 일본 순사들을 끌어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칩시다”라고 연설하였다. 그 뒤를 이어 홍창섭·이덕순·이근수·최은식 등이 나와 “대한에 독립국이 생기면 일본의 야만적 식민정책을 수행하던 관청은 필요없소.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앞잡이인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은 모두 때려 부숴야 합니다”, “양성 읍내에 있는 일본인도 모두 쫓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돌멩이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활동합시다“ 등 만세시위의 투지를 끌어올리는 내용으로 연설을 하였다. 이러한 주도자들의 연설 내용에 크게 공감하여 인근 풀숲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준비하였다. 이날 밤 원곡면의 만세시위대가 양성면으로 행진하고 있을 때, 양성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오후 9시경부터 수백 명의 양성면 주민들은 경찰주재소 앞에 모여 일제 경찰을 향해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해산하려할 때, 양성면 주민들은 원곡면 방향의 성은고개에서 환하게 밝힌 횃불들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횃불은 바로 원곡면 만세시위대였고, 이를 확인한 양성면 주민들은 곧바로 원곡면 주민들과 합류하였다. 이에 2,000여 명 규모로 확대된 만세시위대는 더욱 기세를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지휘에 따라 경찰주재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만세시위대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주재소의 유리창 등을 깨뜨렸다. 대규모 만세시위대의 공격에 놀란 일제 경찰들이 도주하자, 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주재소 건물에 불을 질러 완전히 소실시켰다. 이후 양성면 내를 헹진하며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우편소를 향해 돌을 던져 기물을 부수고, 집기와 서류들을 모두 들어내 우편소 앞마당에서 소각시켰다. 양성면 내의 일제 식민통치 기관들을 응징하는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원곡면으로 돌아와 원곡면 면사무소까지 소실시킨 후 해산하였다. 일제는 4월 3일 원곡·양성 지역으로 조선주둔 일본군 제79연대 소속 약 30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일제 군경에 붙잡혔다. 이른바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죄, 소요죄, 방화죄 등으로 징역 7년(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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