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相根
相根1892. 12. 27 ~ 1945. 5.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4월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2년 12월 27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 두 지역 주민들의 연합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28일부터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는 만세시위가 본격화되어 지속되었다. 4월 1일 원곡면의 만세시위대가 양성면으로 행진하여 만세세위를 전개함에 따라 두 지역의 주민들이 연합한 대규모 만세시위로 확대, 발전되었다. 원곡면과 양성면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개편으로 안성군에 통합되기 전까지 과거 오랫동안 양성군(陽城郡)에 속한 지역으로 주민들 사이의 친밀감이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같은 마을에 거주하던 이유석(李裕奭)과 홍창섭(洪昌燮) 등으로부터 “오늘밤 모두 면사무소로 가서 만세시위를 하자”는 내용의 만세시위 계획을 4월 1일 전달받고,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이한기(李漢基)·이성률(李聖律)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날 밤 다른 주민들과 함께 원곡면 면사무소로 가서 이유석 등의 지휘에 따라 큰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주도자들은 원곡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을 밖으로 끌어내, 이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면사무소 직원들이 만세시위대의 요구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고, 만세시위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이유석 등 주도자들은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 일제의 주요 기관들이 위치한 양성면으로 행진하여 양성면의 주민들과 함께 더욱 강도 높은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정하고, 시위대를 향해 “양성으로 가자”고 외쳤다. 이에 적극 호응하며 횃불을 들고, 행진의 선두에 면장 남길우를 앞세워 양성면을 향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만세시위대가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성은고개에 도착하자, 잠시 만세행진을 멈추고 일제의 식민통치를 성토하는 집회를 가졌다. 시위대 앞으로 이유석·홍창섭 등이 차례로 나와 만세운동의 취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돌멩이·몽둥이 등으로 양성면에 위치한 일제의 통치기구들을 공격하여 독립의 의지를 확실히 밝히자는 내용을 연설하였다. 이에 크게 감동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주변에서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주어 들었다. 다시 이유석 등 주도자들의 지휘에 따라 시위대열을 형성하고, 양성면을 향해 ‘독립만세’를 더욱 큰 목소리로 외치며 행진하였다. 이때는 양성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이날 밤 9시경부터 수백 명의 양성면 주민들은 경찰주재소 앞에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규탄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양성면의 만세시위가 끝나갈 무렵, 다른 원곡면 주민들과 함께 성은고개로부터 ‘독립만세’를 외치며 양성면으로 진입하였다. 양성면 주민들은 만세시위 행렬을 확인하자 해산하지 않고, 원곡면 만세시위대에 합류하여 더욱 대대적이고,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약 2,000명의 규모로 확대된 만세시위대와 함께 경찰 주재소로 행진하여 ‘독립만세’를 크게 외친 후,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돌을 던져 주재소의 유리창을 깨뜨렸다. 이후 이유석 등의 지휘에 따라 양성우편소와 양성면의 면사무소, 일본인 상점과 집을 대상으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자정이 넘도록 양성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주도자들의 지휘에 따라 원곡면 면사무소 앞으로 돌아와 이곳에도 돌을 던지는 등의 활동을 전개한 후 해산하여 귀가하였다. 4월 1일 시작하여 4월 2일 새벽까지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는 동안 일제 군경의 출동은 없었다. 그러나 2일 후인 4월 3일 일제는 조선주차군 제79연대 병력을 비롯한 30여 명의 군경을 원곡·양성 지역으로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조사·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4월 1일의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안성경찰서로 붙잡혔다. 이후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죄 등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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