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李思弼

思弼

1888. 12. 5 ~ 1925. 4. 22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思弼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기 시흥(始興)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시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4월 진위군 오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8년 12월 5일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 봉천리(鳳天里, 현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진위군(振威郡) 오성면(梧城面, 현 평택시 안중읍) 학현리(鶴峴里)로 이주하였다. 1919년 4월 1일부터 4월 3일까지 공재록(孔在祿), 지역 서당의 한문교사 김용성(金容成)과 함께 진위군 오성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진위군에서는 만세운동이 시작된 서울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오성면 지역을 중심으로 3월 10일 최초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후 한동안 만세시위가 전개되지 않다가 4월 초에 와서 진위군의 여러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 강한 불만과 함께 나라의 자주 독립을 염원하며 생활하던 중, 4월 1일 안화리(安和里)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안화리에서 한국 독립에 대해 인식을 같이 하고 있던 공재록, 학현리 서당의 교사 김용성과 의기 투합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 군경의 경계가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파악하고, 김용성·공재록과 논의하여 현실적으로 대규모 만세시위 조직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여 횃불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마을 주민들에게 참여를 호소하였다. 4월 3일 밤, 김용성·공재록과 함께 만세시위의 취지에 공감한 12~13명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학현리에 위치한 봉오산(鳳梧山)으로 올라가 짚단을 쌓아 불을 피워 봉화를 올렸다. 주민들을 지휘하여 횃불을 밝혀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시위에 참여한 주민들도 일제히 호응하여 각자 횃불을 밝혀 흔들며 큰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따라 외치자, ‘독립만세’의 외침이 산골짜기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메아리쳤다. 밤늦게까지 횃불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의 횃불만세시위 이후 참여자들을 조사·색출하게 위해 학현리로 파견된 일제 경찰에 김용성·공재록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