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大夏
大夏1890. 6. 10 ~ 1950. 7. 1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서산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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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0년 6월 10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현 당진시 대호지면) 사성리(沙城里)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도호의숙(桃湖義塾)에서 한학(漢學)을 하고, 대호지면 저축조합의 서기로 근무하면서 천도교에 입문하여 활동하였다. 백부인 대호지면장 이인정(李寅正)과 함께 1919년 4월 4일 서산군 대호지면·정미면 천의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호지면의 만세운동은 남주원(南柱元)·이두하(李斗夏)·남계창(南啓昌)·남상직(南相直)·남상락(南相洛)·남상희(南星熙) 등 도호의숙 출신의 유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고종의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유생과 지역 유지의 뜻을 모아 만세운동으로 구체화한 것은 면장 이인정(李寅正)을 비롯한 면사무소 직원들이었다. 1919년 3월 26일 대호지면사무소에서 면서기 김동운(金東云)·강태훈(姜泰壎)·민재봉(閔載鳳)과 면사무소 직원 송재만(宋在萬) 등이 회합을 갖고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다음 날인 3월 27일 다시 모여 김동운이 “4월 4일 오전 8시경까지 도로 수선을 위해 면민 각 호 1명씩 집합하라는 공문을 작성하여 구장들에게 배포하고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자”라고 실행 방안을 제시하였다. 4월 3일에는 송재만이 9개 마을의 구장에게 도로 수선을 위해 집합하라는 내용의 면장 명의로 된 공문을 전달하며 주민들에게 고지하도록 부탁하였다. 4월 4일 아침 면사무소 앞에 600여 명의 주민들이 집결하였다. 백부인 면장 이인정은 “오늘 여러분을 모이게 한 것은 도로 보수가 목적이 아니라, 독립 운동이 목적”이라고 연설하였다. 이 연설을 들은 많은 주민들이 공감하여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송재만 등의 지휘로 시위 대열의 선두에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천의장터를 향해 행진하였다. 시위 대열이 천의장터에 도착하자 시장에 나온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속속 동참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약 1,000명에 이르렀다. 오전 11시경 천의장터에 도착해서 곧바로 만세운동을 위한 집회를 열었다. 남주원의 뒤를 이어 일제에 대한 규탄과 독립의 필요성을 연설하고, 한운석이 지은 「애국가」를 선창하였다. 이후 1,0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천의주재소의 순사들을 무력화시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가 마무리될 무렵 천의장터로 급파된 당진경찰서 순사들의 발포로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천의주재소로 달려갔다. 송재만과 함께 행동선봉대원 및 주민들을 지휘하여 주재소 습격을 주도하였다. 일제 경찰을 구타하고 주재소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다지리(田屈)가 일제 경찰을 옹호함에 주민들을 이끌고 다지리의 집으로 가서 집안에 있던 엽총 1정과 권총 1정을 탈취한 후 해산하였다. 이날의 시위 이후 홍성헌병수비대에 붙잡혀 서산경찰서에 갇혔다.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점이 인정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 강도죄 등으로 징역 4년과 벌금 30원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같은 해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1922년부터 1926년까지 대호지면 사성리에 간이 학당을 설치하여 교육활동을 전개하였고, 일제의 조선어 교과목 폐지에 대항하여 자택에 서당을 설치하고 한글 교육을 실시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40년 폐쇄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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