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成九
成九1897. 10. 11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병인의용대
- · 한국노병회
- · 한국독립당
- ·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
- ·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
- · 중한민중토일동맹
- · 대한교민단
- · 정위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관련 사건
- · 1919년 선천군 만세운동
- · 윤봉길 의거
- · 이봉창 의거
- · 만보산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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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8) 1897년 10월 11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수청면(水淸面) 고읍동(古邑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수봉(李秀峰)·이수복(李守福)·이동농(李東儂)이다. 부인은 임정숙(林貞淑)이다.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프랑스 조계(佛祖界) 김신부로(金神父路)에 거주하였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19년 선천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태산면장 처단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심을 거쳐 1921년 1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방화소요죄로 징역 7년 6월을 받았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병보석으로 형 집행이 정지되고 풀려났다. 1923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에서 식자공(植字工)으로 근무하였다. 1925년 6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 외곽단체로서 정위단(正衛團)이 조직되자,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1월 1일 박창세(朴昌世)·문일민(文一民)·강창제(姜昌濟) 등과 함께 정위단을 근간으로 하는 의열투쟁단체인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고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2월 병인의용대 대원 장진원(張鎭元)·최병선(崔炳善)·김광선(金光善)이 친일행위자를 처단하는 과정에서 장진원·최병선이 상하이일본총영사관에 붙잡혔다. 이에 같은 해 4월 6일 나창헌(羅昌憲)·강창제·김창근(金昌根) 등과 협의하여 일본총영사관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4월 8일 김광선·김창근과 함께 총영사관 경찰 관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1927년 강창제·김창근과 함께 시한폭탄으로 총영사관 창고를 폭파하고 일제 경찰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또한 친일행위자 2명을 유인하여 처단하였다. 1928년 7월 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개최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 상하이지부(上海支部) 집행위원회의 검사위원(檢査委員)으로 오명(吳明)·최남식(崔南植)과 함께 선임되었다. 1929년 1월 5일 개최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제26회 이사회에서 특별회원으로 입회하였다. 1930년 5월부터는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의경대(義警隊)에서 활동하였다. 1931년 7월 10일 흥사단(興士團)·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병인의용대·소년척후대(少年斥候隊)·소년동맹(少年同盟)·한인예수교회 등 단체 대표자 약 30여 명과 함께 회의를 개최하였다. 병인의용대 대장으로 다른 대표자들과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에 대한 대책에 대해 토의하였고, 회의 결과 만보산사건에 대처하기 위해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上海韓人各團體聯合會)’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안창호(安昌浩)·오의순(吳義橓)·박창세·송병조(宋秉祚)와 함께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이때 상무위원들은 중국과 협조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조직계획을 세우고, 조선의용군 상해총사령부의 명의로 선언을 발표하였다. 향후 조선의용군을 토대로 중국과 연대하여 중한연합의용군(中韓聯合義勇軍)을 창설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의용군 조직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1931년 12월 중순 김동우(金東宇)·이덕주(李德柱)·유상근(柳相根) 등과 함께 한국의용군을 조직하기로 하고,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승인을 요구하였다. 1932년 윤봉길(尹奉吉) 의거 직후 상하이에서 항저우(杭州)로 이동하였다. 그해 11월 2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이하 5개 단체와 중국 항일 제 단체 대표자가 협의하여 중한민중토일동맹(中韓民衆討日同盟)을 조직하자, 중한민중토일동맹 특무부(特務部) 부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이유필(李裕弼)·차리석(車利錫)·이기성(李基成)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기관지 상해한문(上海韓聞) 발간에 참여하였다. 상해한문에서는 1933년 이봉창(李奉昌) 의거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였다. 1933년 1월 15일 한국독립당 간부 이유필·김동우·안경근(安敬根) 등 17명과 함께 재상해한국독립당대회(在上海韓國獨立黨大會)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당세(黨勢) 확장을 위해 운동방침을 개혁하고 자금 조달 기관으로 경제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하였고, 이사(총무부)에 선임되었다. 1933년 4월 27일 대한교민단 이사회가 개최되었고, 이경산(李景山)과 함께 정무위원회 간사에 선임되었다. 1933년 10월 12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백제약방(百濟藥房)에서 프랑스 경찰에게 붙잡혀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넘겨졌다. 중국 측에서는 ‘중국인’을 체포하여 일제에 인도한 프랑스 측에 항의하면서 신병을 중국 측에 인도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주중일본공사관(駐中日本公使館)에서는 조선총독부 경무국(警務局)에 호적 조사를 의뢰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 호적이 존재한다는 내용을 주중일본공사관에 회신하자, 이를 근거로 일제는 중국 측에 신병을 인도하지 않았다. 1933년 12월 14일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12월 19일 인천으로 압송되어 경기도경찰부에 인계되었다. 이후 평안북도경찰부에 넘겨져 12월 21일 신의주(新義州)로 압송되었다. 평안북도경찰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충심성(衝心性) 각기병(脚氣病)으로 치료를 받았다. 1934년 1월 29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2월 5일부터 1919년 만세시위 당시 받은 잔여 형기가 집행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34년 3월 16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및 폭발물취체벌칙 위반으로 징역 7년을 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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