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昭應
昭應1852. 8. 7 ~ 1930. 3. 2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소응 의병부대(춘천의병)
- · 유인석 의병부대(제천의병)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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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1852년 (음)8월 7일 강원도 춘성군(春城君, 현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면(南面) 하방곡리(下芳谷里)에서 이도재(李道栽)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경기(敬器)이며, 호는 습재(習齋) 또는 사정거사(思靖居士)이다. 이명은 이의신(李宜愼)·이직신(李直愼)을 사용하였다. 선조(宣祖)의 아들인 경창군(慶昌君) 주(珘)의 후예이고, 6대조인 화평군(花平君)이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춘천(春川)으로 이거한 뒤 이곳에 세거하게 되었다. 아명(兒名)을 중만(仲萬)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중니(仲尼, 공자(孔子))가 만세사표(萬世師表)’란 뜻에서 취한 것이다. 6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7세 때부터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통감·사략 등을 공부하였으며, 11세 때부터 과거공부에 매진하였다. 15세 때 고흥 류씨 승기(承基)의 딸과 결혼하였다. 21세에는 서경과 주역 등을 밝게 풀이할 수 있었다. 다음해 경기도 가평(加平)의 한포서사(漢浦書社)에서 강학 중이던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 들어갔다. 후일 그의 누이가 유중교의 아들인 유의석(柳毅錫)과 혼인해 스승과 사돈관계가 되었다. 유중교 문하에서 화서학파의 춘추대의적 의리론과 명분에 입각한 존화양이사상을 철저히 계승하였다. 1874년 봄 스승을 따라 가평에 소재한 조종암(朝宗巖)의 대통단(大統壇)에 참배하였다. 일본의 강압으로 개항이 논의되던 1876년 1월에는 화서학파 동문들과 함께 대궐 앞에 나가 개항을 반대하는 「척양소(斥洋疏)」를 올리는데 참여하였으나, 관철시키지는 못하였다. 1877년에는 『부녀감계서(婦女鑑戒書)』를 저술하였고,1879년에는 「존명설(尊明說)」·「경천설(敬天說)」·「사자존양설(四子存養說)」 등을 지었다. 특히, 『존명설』에서 소중화론에 입각한 위정척사론을 정립하였다. 1889년 유중교를 따라 충북 제천군(堤川郡) 봉양면(鳳陽面) 장담리(長潭里)로 이주하고, 스승을 모시면서 수학하였다. 유중교는 춘천이 서울과 가까워 개화파 무리들을 날마다 본다면서 깊숙한 산중으로 이사한 것이다. 1890년에는 유중교를 따라 청풍군(淸風郡) 황강(黃江)으로 가서 권상하의 영정을 참배하고, 화양동(華陽洞)으로 가서 만동묘(萬東廟)에 참배하였다. 1893년 유중교가 서거하자, 부모상을 당한 듯이 슬퍼하였다. 1894년 6월에는 김홍집 내각이 단행한 갑오경장으로 신제도가 공포되자, “오랑캐의 제도를 따를 수 없다”라면서 이후 호적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다음해에는 「훼복훼형론(毁服毁形論)」을 지어 단발과 의관제도의 변혁을 유교적 입장에서 비판하였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11월 단발령이 반포되자 유중악(柳重岳) 등과 ‘자정수지(自靖守志)’ 할 계책을 세우고, 경기도 지평(砥平)의 용문사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이때 마침 지평에서 이춘영(李春永)이 의병을 일으켰으니 춘천의 사우들도 응할 수 있으면 응하라는 유인석(柳麟錫)의 편지를 받았다. 이러한 때에 춘천에서도 1896년 1월 18일 정인회(鄭仁會)와 성익현(成益鉉)·박현성(朴玄成) 등이 의병을 일으키고 관찰부와 군아를 점령하고, 가렴주구를 일삼은 전 유수 민두호(閔斗鎬)의 생사당(生祠堂)을 불태웠으며 민두호의 아들 민영준(閔泳駿)의 집기를 부쉈다. 하지만 의병부대를 주재하는 인물이 없어 흩어지려 할 때 1896년 1월 20일 의병장으로 추대되면서 의병부대를 수습하였다. 의병장에 추대된 후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에 제단을 쌓고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고하는 천제를 지냈다. 1896년 1월 26일에는 ‘춘천의병소(春川義兵所)’의 이름으로 각 면의 부호들에게 글을 보내 군량의 납부를 독려하고, 이를 수합하여 군아의 연병장에 쌓아 두었다. 그리고 춘천 관찰부의 군기고를 열어 의병들에게도 무기를 나눠주고, 서울 진격에 대비하여 주야로 훈련하였다. 이어 의병의 기강 확립을 위하여 의병 해산을 요구한 초관 박진희를 처단하였다. 또 양주 사람 이재풍을 선봉장으로 삼아 가평으로 보내 의병을 모집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패역을 일삼다가 사로잡혀 오자 참수하였다. 1896년 1월 28일에는 신임 춘천관찰사로 부임하던 조인승(曺寅承)을 체포하여 압송한 뒤 춘천부 청사 앞에서 총살하였다. 그리고 1월 31일자로 「격고팔도(檄告八道)」라는 격문을 발표하여 다함께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 격문에서 ‘왜노(倭奴)’와 적신들이 국모를 시역하고 임금의 머리를 깎은 처사에 의병을 일으켰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어서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쳐 국가의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을 것이며 의병을 방해하는 지방관은 응징할 것을 천명하였다. 춘천의병은 춘천관찰부의 공전(公錢)을 군자금으로 충당하였고, 춘천군의 역마(役馬)를 징발하여 의병장과 연락병이 사용할 군마로 삼았다. 서울 진격을 목표로 삼고, 2월 1일 성익현(成益鉉) 휘하의 의병 선봉대가 춘천을 떠나 경춘가도의 안보역(安保驛)에 도착하였다. 조인승의 처단 소식을 들은 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은 춘천의병을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1월 31일 친위대 1개 중대를 급파하였다. 이때 일본군도 친위대의 군사 행동을 지도하고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특무조장 1명과 하사 1명을 합류하였다. 이어서 친위대 제1대대장 신우균(申羽均)과 제2대대장 김구현(金龜鉉) 휘하 2개 중대의 병력을 추가로 파견하였다. 춘천의병은 2월 2일 서울에서 출정한 친위대 병력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가평의 앞산인 벌업산[보납산(寶納山)]에 진을 쳤다. 춘천의병은 이충응(李忠應) 등이 거느린 가평의병과 합세하여 관군과 대치하며 포를 쏘며 시위하였다. 다음 날 비가 내리자 관군은 습기에 취약한 화승총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의병이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게 된 틈을 타서 벌업산 아래에서부터 일제히 총을 쏘며 공격하였다. 의병은 유리한 지세를 이용하여 맞섰으나, 비 때문에 화승총이 무력화되면서 결국 패해 흩어졌다. 춘천으로 퇴각한 춘천의병은 약사현(藥司峴) 부근에 진을 치고 주둔하였다. 이때 화력을 보충하기 위해 갖고 있던 의병부대의 통수권을 종형이던 이진응(李晉應)에게 맡기고,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아가 원병을 청하였다. 맹영재는 이소응의 사위인 맹달재(孟達在)의 일족이면서, 수백 명의 포군을 동원하여 동학군을 진압한 공으로 지평군수에 임명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포군을 지원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도리어 맹영재에게 붙잡혀 구금되면서 원군에 대한 기대는 좌절되었다. 이후 유인석이 보낸 제천의병 이찬익과 정익(鄭瀷) 등의 노력으로 구출되었다. 그리고 제천으로 내려가 유인석 의병부대에 합하였다. 이후 춘천의병에 합류하고자 하였으나, 춘천의병은 이미 관군에 의해 진압된 후였다. 한편, 춘천의병은 2월 8일 약사현 뒷산에서 벌어진 관군과의 전투에서 또다시 패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군에 포위당한 이진응은 자결로 저항하였다. 관군이 돌아간 후 남은 의병들과 함께 이진응의 동생 이경응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재기하여, 3월 17일 광진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이천의병과 연합 작전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천의병의 근거지인 남한산성이 함락되면서 다시 춘천으로 회군하였다. 유인석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참모로 활약하면서, 「군중사무대강(軍中事務大綱)」을 지어 의병 기강을 확립하는 방안과 의병의 방략을 개진하였다. 이 글에서 국모를 시해하고 머리를 자르게 한 이유로 의병을 일으켰다면서 대의를 떨쳐 왜적을 물리쳐야 함을 밝혔다. 제천의병은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세력을 떨쳤으나, 5월 25일 제천의 남산전투에서 패한 후 서행을 결행하였다. 유인석은 관군과 일본군의 예봉을 피하여 서북쪽인 강원도와 평안도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의병을 초모해 항전을 계속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장기렴 부대를 보내 뒤쫓게 하였으며, 한편으로 선유사 정언조(鄭彦朝)를 보내 의병해산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유인석은 오히려 정언조를 꾸짖어 보내고, 상소를 올려 옛 제도를 회복하지 못함과 일본군을 물리치지 못함을 들어 의병 해산령을 따를 수 없다고 밝혔다. 이후 의병부대는 춘천과 강릉을 지나 북상을 계속하였다. 7월 22일 낭천전투에서 서상렬(徐相烈)이 사망하였으나, 7월 24일 양구전투에서는 승리하였다. 그러나 유인석은 국내에서 전개한 의병 활동을 접고 잔여 의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가 재기를 준비하였다. 이를 위해 유인석을 따라 서행할 계획을 세우고 본진에 앞서 황해도 연백 등지에 도착하여 유치경(兪致慶)을 만나 해서지역의 물정을 살폈으나, 의병을 다시 꾀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유인석을 떠나 금천으로 가서 신(愼) 진사 집에 머물렀고, 이때부터 이름을 의신(宜愼)으로 고치고 호를 사정거사(思靖居士)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1896년 (음)5월 「정명설(定名說)」을 지었다. 같은 해 (음)10월에는 원주 치악산 동쪽 배양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1898년 봄 유인석의 편지를 받고 중국 지린성 퉁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유인석과 함께 의리를 밝히는 말이라는 「의체(義諦)」를 지어 항일의지를 다졌다. 같은 해 (음)9월에는 의병 사실을 정리한 「척화거의사실대략(斥和擧義事實大略)」을 저술하였다. (음)10월에는 퉁화현 팔왕동(八王洞)으로 이주하였으며, 1900년 (음)3월에는 유인석과 함께 향약을 베풀었다.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동료 사우들과 같이 압록강을 건너 일시 귀국하였다가, (음)윤8월에 다시 팔왕동으로 들어갔다. 같은 해(음)11월 다시 원주로 돌아왔으며, 1901년 (음)2월에는 황해도 평산의 두만(斗戀)으로 이주하여 산속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1904년 겨울에는 제천군 내에서 향약을 실시하였고, 다음해 3월에는 제천향교에서 강회를 열었다. 1906년 봄에는 자양영당의 건립에 착수하여, 1907년 (음)9월 완공하였다. 이때부터 매년 (음)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제례를 거행하였다. 건립 초기에 자양영당에는 주자와 우암 송시열, 화서 이항로, 성재 유중교 등 4인의 영정만 봉안하였으나, 이후 유인석의 영정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국내에 머무는 동안 일제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았다. 1909년 봄에는 일진회원들에게 횡포에 당해 청풍 장선리로 이주하였다. 병탄 직후인 1910년 9월에는 이 지역 항일의 기세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일제 경찰에게 청풍읍으로 끌려가 10여 일간 감금당하기도 하였다. 1911년에는 재차 서간도로 망명을 결행하였다. 국치로 인해 더 이상 국내에서 머물 수 없었던 상황에서 부인이 1911년 (음)1월 작고하자, 같은 해 (음)4월 가족과 함께 펑텐성(奉天省, 현 요녕성) 화이런현(懷仁縣) 대황구(大荒溝)로 망명하였다. 1915년 콴뎬현(寬甸縣) 문화사(文華社) 만구(灣溝)로 거처를 옮기고, 이곳에다 제천에서부터 지니고 온 자양영당의 4인 영정을 봉안하였다. 1918년에는 유인석의 아들 유제함, 그리고 유의석 부자를 콴뎬현 천산사(泉山社) 전자구(甸子溝)에서 만나 함께 겨울을 지냈다. 이어 1919년 1월(음)에는 전자구로부터 10여 리 떨어진 중국인 손희춘(孫希春)의 집으로 옮겨갔다. 1922년 2월(음) 봉황성(鳳凰城) 동대보(東大堡) 서산리(西山里)로 이주하였다. 1927년에는 외몽고의 강평현(康平縣) 제7구 민가둔(民家屯)으로 이주하였고, 여기에서 1929년 유중교의 문집인 『성재집 (省齋集)』을 간행하였다. 1946년 자양영당에 더불어 배향되었고, 1969년 문인들이 3년 여에 걸쳐 『습재선생문집(習齋先生文集)』을 완성해 간행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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