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昌德
昌德1893 ~ 1921. 4. 2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 · 서로군정서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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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8)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중산면(中山面) 광천리(廣川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93년생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만주로 이주한 이후 1919년 4월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17일 최석(崔錫)과 함께 환런현(桓仁縣) 홍석뢰자(紅錫磊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같은 해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조직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이다. 만세운동을 계기로 보다 효과적인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주로 의병 계열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총재는 박장호(朴長浩)였고, 사무 기구인 총단의 총단장은 조맹선(趙孟善)이었다. 대한독립단은 항일 무장 투쟁의 전개를 위해 우선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 만주 지역의 각 지단에 재무부를 두었으며, 부유한 한국 교민들에게는 25원씩을, 그 외에는 모두 15원씩을 징수하였다. 대한독립단의 전투 활동은 대부분 압록강 대안의 평안 지방에서 많이 벌어졌다. 그 후 서로군정서에 입대하였다. 서로군정서는 1919년 4월 초순 류허현 고산자(孤山子)에서 조직된 군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함으로써, 그해 11월 명칭을 개칭한 것이다. 서로군정서는 독판제(督辦制)로 운영되었는데, 독판 이상룡(李相龍)·부독판 여준(呂準)·정무총장 이탁(李鐸)·내무사장 곽문(郭文)·법무사장 김응섭(金應燮)·재무사장 남정섭(南廷燮)·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참모부장 김동삼(金東三)·사령관 지청천(池靑天) 등이 활동하였다. 서로군정서는 주로 군자금 모집, 무장 활동, 선전 활동 등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만세운동 이후 국내에서 많은 애국 청년들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서로군정서에서는 학교의 확장이 시급함을 인정하고 류허현 고산자 하동(河東) 지역에 광대한 병사(兵舍)와 수만 평의 연병장을 부설하여 이들의 교육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5월 신흥중학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개칭하고 독립군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0년 8월 14일 정무총장 이탁의 명을 받고, 이종식(李宗植)과 함께 친일파로 알려진 평안북도 후창(厚昌)군수 계응규(桂應奎)를 처단하러 후창 읍내에 진입하였다. 나무꾼들에게 돈 받을 것이 있어서 체재하는 것처럼 꾸미고, 순사와 군서기 같은 인물들과 친밀히 교제하여 교묘히 경관의 경계를 피하면서 처단 대상자의 거동을 정탐하였다. 같은 달 31일 동지 김영석(金榮錫)으로부터 계응규가 신병 때문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 치료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날 밤 비밀리에 군수의 자택으로 가서 동정을 살폈다. 경찰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그날 저녁 요리점에서 순사들과 자리를 함께 하며 그들이 술을 잔뜩 마시게 한 후, 이종식과 함께 9월 1일 새벽 3시 계응규의 집으로 향하였다. 이종식은 계응규의 집 대문에서 망을 보았고, 이때 군수의 집 안뜰에 잠입하여 침실에 드러누운 그의 가슴에 총을 발사하였다. 이에 계응규는 심장에 탄환을 맞고 즉사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21년 2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사형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21일 평양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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