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振武
振武1900. 6. 21 ~ 1934. 5.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 · 통의부
- · 정의부
- · 국민부
- · 노동자위군
- · 재만조선인혁명군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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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1900년 6월 21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옥천면(玉泉面) 월옥동(月玉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유전(有田)·성상(星霜)·송해(松海)·득성(得成)·숙산(肅山) 등이고, 애꾸눈에 바람같이 나타나 공격하고 사라진다 하여 일목장군(一目將軍), 흑선풍(黑旋風) 등의 별명을 가졌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만주로 넘어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였다. 대한독립단은 경술국치 후 서간도로 망명해 재기를 도모하던 의병출신 독립운동가들이 1919년 4월 15일 관동의병장 출신 박장호(朴長浩)를 도총재(都總裁)로 하여 결성한 독립군단이었다. 서간도로 넘어가 환런현(桓仁縣) 노흑산(老黑山)에 도착해 그 곳의 지단원인 이성돈(李成敦)의 권유로 대한독립단 제2중대원이 되었다. 가입 후 유격대에 편성되어 평북 창성군(昌城郡)으로 진입하였다. 창성군에서 목적지를 향해 야간 행군을 하던 중 일제 경찰대를 만나 전투를 벌였다. 총격전으로 주변이 소란해지자 유격대는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본부로 돌아왔다. 이 국내진입전 이후 압록강을 넘나들며 지속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2년 초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이 보다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통합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한족회(韓族會)·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 등의 독립군단들이 하나로 뭉쳐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성립시켰다. 이어 같은 해 8월 23일에는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대한정의군영·평안북도독판부 등을 더 가입시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탄생시켰다. 이때 최석순(崔碩淳)이 중대장인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2중대 소속원이 되었다. 1923년부터 본격적으로 압록강을 넘나들며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1924년 초 동지 11명과 함께 국내로 진입해 평북 선천군(宣川郡) 동면(東面) 월봉동(月峯洞)에 소재한 광산을 습격해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어 남면(南面)에 있는 일제의 삼봉동(三峯洞)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그곳에 주재하고 있던 일제 경찰들을 저격해 부상시키고 무기를 탈취한 뒤 주재소를 소각시켜 버렸다. 주재소가 소각되고 경찰이 중상을 당하자 일제는 선천군을 포함한 국경지방에 초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대원 4명과 함께 본부로 귀환했으나 다른 7명의 대원은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대원들의 진술에 따라 대략 이 시기부터 국경지방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일목대장 또는 흑선풍의 별명을 갖게 되었다. 이 유격활동을 포함해 통의부 의용군 소속으로 10여 회 국경을 넘나들며 510여 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였고, 일제 경찰대와 세 차례 전투를 벌였다. 이념을 초월하여 통합된 대한통의부였지만 1922년 하반기 복벽주의계와 공화주의계 간에 갈등이 일어났다. 갈등은 결국 폭력사태로까지 이어져 복벽주의 계열의 전덕원(全德元)·채상덕(蔡相悳) 등이 1923년 2월 새로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조직해 대한통의부를 떠났다. 이어 1924년 초에는 채찬(蔡燦)·김원상(金元常)·박응백(朴應伯) 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협의한 뒤 그 소속 군대인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시켜 이탈하였다. 1924년 11월 24일 결성된 정의부(正義府)에 참여하였다. 초급 간부인 정사(正士)가 되어 국내진입 유격활동을 계속하였다. 1925년 7월 4일 대원 5명을 지휘해 평북 철산군(鐵山郡) 참면(站面) 서부동(西部洞)으로 진입하였다. 유격대는 먼저 주류제조회사와 우편소를 습격해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어 차련관(車輦舘)주재소를 기습 공격하여 무라카미(村上) 경부보를 포함한 4명의 일제 경찰을 사살하였다. 1925년 9월에는 김성숙(金聖琡)·정상조(鄭相祚)·허대섭(許大涉) 등으로 유격대를 결성해 평북 구성군(龜城郡)으로 재차 들어 왔다. 같은 달 25일 밤 8시경 이동 중이던 유격대는 천마면(天摩面) 신시동(新市洞) 강변에서 마주친 신시주재소의 이노우에 도모시치(井上友七)·레이제이 하츠카즈(冷泉初一) 등 일제 경찰이 불심검문을 하려 하자 그들과 접전을 벌였다. 유격대는 레이제이 하츠카즈에게 중상을 입히고 본부로 귀환하였다. 1926년 (음)5월 김승엽(金承燁)·조원국(趙元國)·김인옥(金仁玉)·김성숙 등으로 유격대를 조직해 구성군 천마면 송수동(松水洞)에서 군자금 200원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8월 27일에는 일제 경찰관 주재소와 우편소를 습격할 목적으로 구성군 방현면(方峴面)으로 이동했다가 불심검문 하려 한 한국인 순사 김봉규(金奉奎)를 저격해 부상 입히고 본부로 귀대하였다. 1927년 7월 24일 유격대를 이끌고 구성군 관서면(舘西面) 조악동(造岳洞)으로 진입하였다. 유격대를 2개 조로 나누어 조악주재소를 기습 공격해 일제 경찰 시게타메 요시(重爲好)를 사살하였다. 진군을 계속해 같은 해 8월 18일 밤 정주군 옥천면 월옥동에 있는 여관에 들어가 약 20명의 투숙객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독립군임을 밝히고 410원과 금시계 3개를 군자금으로 받아냈다. 야간 행군을 이어가 자정쯤 이현면(梨峴面) 하단동(下丹洞)에 있는 또 다른 여관에 들어가 이곳에서도 투숙객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달 31일에는 야밤을 이용해 지난해에 갔던 천마면 송수동에 다시 들어 가 8월 4일까지 머물면서 부호 3명에게 134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곳에서 일제 경찰 6명과 마주쳤으나 총격전을 벌이며 빠져 나와 분부로 전원 무사히 귀환하였다. 1929년 (음)8월 부하 김계원(金啓元)·박인홍(朴仁弘)과 단 3명으로 유격대를 조직해 국내로 진입하였다. 그해 11월 초까지 평북 지역을 돌며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다, 같은 달 9일 본부로 돌아가기 위해 의주군(義州郡) 광평면(廣坪面) 청수동(靑水洞)에 도착하였다. 유격대는 이곳을 순시하던 11명의 일제 경찰대와 마주쳐 접전을 벌였으나 무사히 분부로 귀환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당시 신문은 “500경관대를 달고서도 오히려 여유 작작히” 활동한다고 보도하였다. 192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재만독립운동계에는 독립운동계를 하나로 통일하자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1928년 12월 북만주를 총괄 관할할 혁신의회(革新議會)가 성립되고, 1929년 4월 1일에는 남만주를 총괄 관할할 국민부(國民府)가 성립되었다. 혁신의회는 이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군(軍)을, 국민부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군을 만들어 이당치국(以黨治國)의 형태로 만주독립운동계를 이끌어 갔다. 혁신의회 쪽을 택한 일부가 있었지만, 정의부 소속 인사들 대부분은 국민부를 택하였다. 이때 국민부의 조선혁명군 소속 독립군으로 편입되었다. 1930년 6월 국민부 일부 간부들이 유격대가 목숨을 걸고 모금한 군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을 접하고 이윤환(李允煥)·김석하(金錫河) 등 뜻이 맞는 상관들과 상의한 후 유격대를 이끌고 간부들을 응징하고자 싱징현(興京縣)으로 갔다. 그러나 싱징현 중국관헌들이 저지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 사건이 있고 얼마 후 주마골(朱馬骨)이 이윤환과 김석하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1932년 2월 유격대를 이끌고 주마골의 거처를 습격해 그를 비롯한 추종자 5명을 사살하였다. 1931년 2월 7일 국민부를 탈퇴하고, 안국형(安國亨)·박인홍(朴仁弘)·홍학순(洪學淳)·황세일(黃世日)·최영걸(崔永杰)·전광도(全廣道)·조국원(趙國元) 등과 함께 노동자위군(勞動自衛軍)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그해 (음)4월 재만조선인혁명군(在滿朝鮮人革命軍)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동지들과 수차에 걸친 국내진입전을 전개하였다. 1932년 1월 10일 부하인 안국형과 박인홍이 체포되고, 16일까지 나머지 단원들과 함께 일제 첩자의 계략에 속아 연이어 붙잡혔다. 1933년 6월 26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부하 홍학순과 함께 사형을 받았다. 판결 후 “구태여 우리들이 한 일을 변명할 필요가 없고, 또 그만한 것은 각오한 것이니 항소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듬해인 1934년 5월 18일 평양형무소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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