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石榮
石榮1855. 12. 3 ~ 1934. 2. 1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경학사
- · 신흥강습소
- · 부민단
- · 신흥학교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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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55년 12월 3일 한성부(漢城府) 명례방(明禮坊) 저동(苧洞, 현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서 아버지 이유승(李裕承)과 어머니 정씨 사이의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호는 영석(穎石)·수석(漱石)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0세손이다. 집안은 조선시대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친부인 이유승은 이조판서와 의정부 참찬을 지냈고, 영의정을 역임한 백부 이유원(李裕元)에게 1885년 양자로 입계하였다. 형 이건영(李健榮), 동생 이철영(李哲榮)·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호영(李護榮)과 우애가 돈독하였다. 1885년 9월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891년 동부승지, 1897년 중추원 2등 의관, 1903년 비서원승, 1904년 장례원 소경 등을 역임하며, 관직이 종2품 칙임관 4등까지 올라갔지만, 1905년 을사늑약 전후 사직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이회영이 해외로 나가 독립군기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주장에 흔쾌히 10,000석의 재산을 정리해 일가 60여 명을 이끌고 망명에 동참하였다. 이들의 해외 망명은 이회영이 1908년 경부터 치밀한 계획과 준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1911년 이상용(李相龍)·이동녕(李東寧)·이회영 등과 함께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를 근거로 자치적 성격을 갖는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병농일치의 목표 아래 만주를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하기 위한 첫 출발이었다. 그렇지만 독립운동기지 창건 사업은 현지의 만주 토착인과 군벌의 배타적 압력, 추운 대륙성 기후와 풍토병, 이주민의 재정적 궁핍 등으로 매우 험난하였다. 거기에 1911년~1912년에 걸친 흉작과 수토병(水土病)으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그런 가운데 1912년 가을 경학사를 부민단(扶民團)으로 재편해 갔다. 부민단은 중앙본부를 퉁화현(通化縣) 허니하(哈泥河)로 옮기고, 신흥강습소도 신흥학교(新興學校)로 개편하면서 난관을 극복해 갔다. 이때 신흥학교의 교사를 새롭게 짓기 위해 재정을 후원하였고, 그 결과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1913년 5월 낙성되었다. 이때 교장은 여준(呂準), 교감은 윤기섭(尹琦燮), 학감은 이광조(李光祖)가 맡았다. 신흥학교는 본과와 속성 특별과를 두었다. 본과는 4년제의 중학과정이었고, 특별과는 3개월 또는 6개월 기간의 무관양성을 위한 속성과였다. 특히 본과에서는 일반 중학의 과정에 무관교육을 겸하여 문무쌍전의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무관학교라는 교명을 붙이지는 않았으나, 교과내용은 무관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1914년 9월 당시 신흥학교 학생은 약 40명 정도였으며, 이들은 모두 18~19세부터 24~25세 사이의 청년이 중심이었다. 1919년에는 허니하에서 기름장수와 곡식매매업을 하면서 함께 살던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경신참변 이후 1920년에는 펑텐(奉天)으로 이주하였고, 이때 이상룡이 찾아와 조우하기도 하였다. 한편 1921년 펑텐에 거주하던 아들 이규준(李圭駿)이 국내로 잠입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혔다. 1922~23년에는 옥고를 겪고 돌아온 규준이 거주하던 텐진(天津)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베이징(北京)에 살던 이회영이 아들 규창(李圭昌)을 심부름 명목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1925년 말 규준이 일제 경찰에게 쫓기게 되면서 베이징으로 이주하였다. 1932년 이회영이 상하이(上海)로 활동 무대를 옮길 때 함께 건너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장석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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