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世榮
世榮1869. 8. 4 ~ 1951. 2. 1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중기의병(정운경 의병부대)
- · 후기의병(이강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5) 1869년 8월 4일 충청북도 제천군(堤川郡) 송학면(松鶴面) 장곡리(長谷里)에서 태어났다. 이후에는 제천군 두학동(頭鶴洞)에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字)는 광국(光國)이고,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이세영(李世永)을 사용하였다. 1905년 정운경(鄭雲慶)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고, 1907년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서 감군장(監軍將)과 좌군장(佐軍將)으로 활동하였다. 정운경은 제천 출신으로 1896년 유인석(柳麟錫) 의병부대의 중군장으로 활동하였고, 1905년 충북 단양(丹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정운경이 단양·제천·영풍(榮豊)·청풍(淸風) 일대에서 군사를 모을 때, 300~400명의 장정들과 더불어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일제가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고종)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체결 이후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는 등 강제병합에 박차를 가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충북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강년은 각지에 격고문을 보내 의병을 제천으로 모으고, 이에 호응하여 모인 의병부대들과 함께 제천 천남(泉南)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여러 의병부대가 연합해 있는 형태였으나 지휘체계는 통일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주천면(酒泉面)으로 이동해 이강년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더불어 군제를 개편하였다. 같은 해 (음)8월 1일에는 중군장에 김상태(金尙台), 우선봉에 백남규(白南奎), 좌선봉에 하한서(河漢瑞), 우군장에 이중봉(李重鳳), 좌군장에 이용로(李容魯), 전군장에 윤기영(尹基榮) 등을 새롭게 임명하였다. 이때 감군장(監軍將)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07년 (음)10월 17일 이강년 의병부대는 강원 영월에서 활동하던 남필원(南泌元)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남필원은 도총(都摠) 이중희(李中熙)와 함께 영월·평창(平昌)·정선(旌善) 세 지역에서 솥발[(鼎足)]의 형세를 만들어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좌감군(左監軍)으로서 군사 90명을 이끌고 남필원 의병부대와 합류하였다. 이후 영월군 상동면(上東面, 현 산솔면) 녹전리(碌田里)에 주둔하며 겨울을 대비하기로 하고, 다시 좌군장(左軍將)의 직위를 받아 덕천리(德川里, 현 정선군 신동읍)로 이동해 그곳에서 주둔하며 때를 기다렸다. 1907년 (음)10월 20일 단양 영춘(永春)에서 머무르며 잠복하고 있을 때, 일본군 1개 부대가 경북 점촌(店村, 현 문경시)으로부터 의풍리(儀豊里)에 이르렀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때 장의장(仗義將) 이명상(李明相)으로부터 “동쪽에서 온 일본군을 파수병이 공격하였는데 그들이 지금 계곡에 숨어있으나 본진은 이미 영춘면 오사리 앞의 오사진(梧沙津)을 건넜다”는 급보를 받았다. 그러자 이강년이 본진·별진·좌군의 병사 300명을 거느리고 괴진(槐津)을 통해 먼저 상륙하고, 좌·우선봉장을 지휘하여 정예군 80명을 거느리고 율치(栗峙)에 매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구역리(九歷里) 정탐군으로부터 일본군 18명이 노동(蘆洞)을 지나 영춘면으로 가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중군장 김상태에게 군사 500여 명을 주어 백자동(栢子洞)에 매복하게 하였다. 이때 좌군장으로 600여 명의 군사를 지휘해 남북진(南北津)을 지키며 서북쪽의 일본군을 방어하였다. 그러나 1907년 12월 16일 복상골(현 단양군 어상천면 율곡리)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본군의 기습 사격을 받고 의병부대가 흩어지게 되었다. 같은 해 (음)11월 14일 이강년이 주둔하고 있던 덕우(德友) 산촌(山村)에 하한서·이만원(李萬源) 등이 소수 병력을 이끌고 도착하였고, 이어서 합류하였다. 이후 북상을 결정한 이강년의 명령을 받고 병력과 함께 지소덕리(紙所德里, 현 영월군 북면)로 이동해 그곳에서 이강년의 주력 부대와 만나기로 하였다. 며칠 후인 (음)11월 20일 소오(巢梧)에 주둔하고 있다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이강년의 본진에 합류하였다. 이튿날 일본군이 나타나자 주천의 다래산(月梧山, 주천리 고사 뒷산)으로 후퇴하여 4시간 가까이 교전하였다. 하지만 인솔하던 부하들이 전사하거나 흩어지게 되면서 이강년을 따라 북상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경기도 가평(加平) 화악산 일대, 강원도 등지에서 겨울을 보냈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충청·경북 북부에서 항쟁을 계속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의병장 이강년이 작성산(鵲城山) 전투에서 붙잡혀 1908년 10월 사망하자, 김상태 등과 함께 남아있는 동료들을 모아 의병부대를 이끌어 나갔다. 이후 일제 군경에게 본가가 불태워졌고, 위협받던 가족들을 영춘군(永春郡, 현 단양군 영춘면 별방리)으로 옮겼다. 의병활동을 그만두었는데도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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