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원
權泰源1891. 10. 10 ~ 1967. 9.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해면 3.1운동
- · 병곡면 3.1운동
- · 진보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1년 10월 10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원경(元卿)이다. 일찍이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병곡면 송천동의 사립 대제학교(大濟學校)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1912년 3월 서울에 있는 구세군사관학교(救世軍士官學校)를 졸업하고, 황해도 해주에서 구세군(救世軍) 사관(士官)을 역임하였다. 1916년에는 병곡면 송천동의 구세군 지영(支營)의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7년 구세군 참위(參尉)가 되었으나 1919년 2월 사직한 뒤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平洞)에 거주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2일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려고 서울까지 갔다가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온 지품면 낙평동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으로부터 서울·평양·대구 등지의 만세 시위와 파리강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 채택에 관한 소식을 듣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14일 송천동의 친척 권유동(權有東)을 찾아가 만세 시위에 관해 논의하였으며, 3월 15일에는 병곡면 송천동 장로교 예배당의 조사(助事) 정규하(丁奎河)를 찾아가 김세영에게 들은 국내외 정세를 전한 뒤, 3월 18일 영해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3월 16일 정규하와 함께 창수면 인량동의 권상호(權相浩), 송천동의 남효직(南孝直), 괴시동의 남여명(南汝明) 등에게 영해시장 만세 시위 계획을 말하고 찬동을 얻은 뒤 지품면 낙평동으로 귀가하였다. 이처럼 김세영, 정규하 등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영덕 지역의 토착 향반(鄕班) 권(權)·남(南)·백(白)·이(李)·박(朴) 등 5성(姓)의 명망 있는 인사들을 설득하여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정규하·권영조(權永祚)·남효직·남여명·권상호(權相浩)·박희락(朴羲洛) 등과 함께 영해면 성내동 시장으로 가서 만세 시위에 찬동하여 모인 사람 및 장꾼 2,000여 명을 선도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또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보, 영해공립보통학교 교사 배병렬(裵秉烈) 및 학생들에게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게 하였으며, 영해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영해면사무소·영해우편소 등의 건물과 집기, 각종 서류를 파괴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를 진압하려고 출동한 영해경찰서 서장 시게요시손(茂義孫)을 비롯한 순사 및 순사보 4명을 폭행하고, 또 본서로 철수하는 이들을 추격하여 폭행하였다. 3월 18일 오후 2시경 병곡면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영해면 만세 시위에 이어 정규하·박희락·서삼진(徐三辰)·권영조 등과 함께 약 200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병곡면 병곡동에 도착하여 병곡주재소와 병곡면사무소 부근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정규하·박희락 등과 함께 400~500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병곡주재소, 병곡면사무소 등의 지붕과 기둥만을 남기고 대부분 파괴하였다. 그러나 평해(平海)에서 증원된 헌병 3명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군중의 희생을 염려한 정규하의 설득으로 오후 7시경 해산하였다. 3월 19일에도 영해를 비롯한 병곡·창수·영덕·지품·남정면 일원에서 만세 시위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군인과 경찰의 무력 진압과 탄압으로 8명이 순국하고 16명이 부상을 입었고, 다수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경찰의 심문을 거쳐 기소된 인사는 모두 204명이었다. 판결문에 의하면, 그는 3월 16일 지품면 낙평동으로 귀가하여 구세군 중앙기구가 있는 진보(眞寶)로 가서 구세군 병사 및 부근 사람 40~50명을 규합하여 독립 만세를 불렀다고 진술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영해면과 병곡면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한 뒤, 군경의 진압 과정에서 경계망을 피해 진보(眞寶)로 피신하여 4월 25일 진보면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5일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징역 2년 형이 확정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