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順榮
順榮1883. 11. 3 ~ 1945. 3.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원산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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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함경남도 원산부(元山府) 광석동(廣石洞) 출신이다. 판결문에 1919년 당시 37세와 11월 3일생으로 기록되어 있어, 1883년 11월 3일 태어난 것으로 확인된다. 기독교 전도사로 1919년 3월 1일 원산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대통령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식민지민의 독립 열기가 높아지고 있던 당시 원산에서는 1919년 2월 말 만세시위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시위를 추진하고 있었던 당시 원산 상리교회(上里敎會) 담임목사 정춘수(鄭春洙)도 원산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장로교 신자로서 약종상인 이가순(李可順)에게 만세운동 계획을 알려주면서 원산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자고 제안하고 동의를 얻었다. 2월 26일 경성에서 독립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자, 이를 걱정한 이가순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이가순은 2월 28일 장로교와 감리교 소속 인사들을 중심으로 진성여학교에서 모임을 개최하였다. 차광은(車廣恩), 함하은(咸河殷), 정연수(鄭延壽), 인이극(印利極), 김장석(金章錫), 차용운(車用運), 김기헌(金基憲), 이진구(李鎭九) 등은 만세시위를 일으키자는 제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이어서 이가순은 상동의 차광은(車廣恩) 집에서 등사기로 독립선언서 2,000장을 인쇄하였다. 한편 서울에서 보낸 조선독립선언서가 원산에 도착하자 박희도(朴熙道)는 오화영(吳華英)에게 독립선언서 300장을 전달하였고, 오화영은 이를 곽명리(郭明理)에게 건네주었다. 2월 28일 밤 곽명리는 원산으로 가서 독립선언서를 정춘수에게 건네주었으며, 다시 정춘수는 이가순에게 이를 전달하였다. 3월 1일 이가순은 원산 내 관청에 독립선언서 50장을 보냈으며, 광성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이가순과 함께 원산리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차용운, 차광은, 김기헌, 함하은, 정연수, 인이극, 김장석, 이진구와 함께 원산리 시장에 모인 3,0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원산 일대를 행진하였다. 오후 4시에는 악대를 선두로 하는 500여 명의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일본인이 거주하는 시가지 일대를 행진하였다. 이후 일제에 의해 동원된 원산 헌병대, 원산경찰서, 파출소 3개소, 소방부, 재향군회원 등의 진압으로 시위대는 오후 6시 무렵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군경은 30여 명의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였으며, 이후에도 만세시위 참여 인사들을 연행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군경에게 총 90여 명이 구금되었는데, 이때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일로 1919년 4월 9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같은 해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일부 취소되었지만 다시 징역 2년을 받았다. 재차 “만세시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근거하는 의사행위로서 죄가 아니며, 조선의 독립선언은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유지하는데 있으며 결코 배타주의나 폭행을 동반한 것이 아니다”라며 일제에 의한 법집행에 저항하며 상고하였지만,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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