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
李成鎬1886. 3. 28 ~ 1968. 5. 2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0)
관련 사건
- · 안동군 예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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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0) 1886년 3월 28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부포동(浮浦洞)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1919년 3월 17일 예안면 예안읍 장날에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안동군 예안면 만세운동은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의 주도로 면서기 이중원(李中元)·이광호(李洸鎬)와 잠업(蠶業) 순회교사 이시교(李時敎) 등이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여기에 예안 만촌교회 기독교도와 안동군 유림들도 같은 날에 만세운동을 계획하면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펼쳐졌다. 거사 당일인 17일, 예안면 장터에 있던 오후 3시 30분 선성산(宣城山)에서 ‘독립만세’ 소리를 듣게 되었다. 20~30명의 군중이 일본이 세운 기념비인 대전기념비(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고 만세를 연호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장터에도 태극기를 든 군중들이 화답이라도 하듯 ‘독립만세’를 외치며 달려 나왔다. 세 곳에서 동시에 100여 명의 군중이 쏟아져 나오며 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있던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유림들과 기독교도들도 만세운동에 합류하면서 한순간 시위대는 1,500여 명으로 늘어나 만세소리가 장터를 가득 메웠다. 장터의 만세운동 열기를 이어 이동봉(李東鳳) 등 주도자들과 함께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로 향하는 길에 예안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대에게 태극기를 주며 호응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일본군 수비대까지 동원하여 군중을 가로 막으며 강제로 해산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시위대와 함께 계속 나아가려 했으나 경찰이 주도자 등 15명을 체포하고 시위대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였다. 주도자들이 붙잡히자 부득이 잠시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대부분의 군중과 함께 자리를 뜨지 않고 장터에 남아 있었다. 오후 6시 시위대와 함께 다시 모여 만세시위를 이어가기로 결의하고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한 목소리로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행진하였으며 주재소에 이른 시위대는 구속자 탈환을 위하여 주재소 진입을 시도하였다. 경찰이 막아서며 저지하자 시위대와 함께 돌과 기왓장을 던지며 주재소 안으로 들어갔다. 분노한 시위대와 함께 투석전을 벌여 주재소 문과 유리창을 파괴하며 격렬하게 시위하였다. 일제 경찰은 수비대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향하여 공포를 쏘며 위협하였고 시위대 25명을 붙잡으면서 군중도 흩어지면서 만세시위는 끝이 나게 되었다. 현장에서 붙잡혀 1919년 3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는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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