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炳寬
炳寬1900. 12. 21 ~ 1947. 3. 2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7)
관련 사건
- · 1919년 3월 서울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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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7) 1900년 12월 21일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현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臨陂面) 읍내리(邑內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으로 서울 종로(鐘路) 재동(齋洞)에 있는 하숙집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해 3월 5일 남대문역(南大門驛, 현 서울역) 앞에서 있었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된 이후, 3월 4일 서울 지역의 중등학교 학생 대표들이 정동(貞洞)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기숙사에서 학생단(學生團)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다. 이 때 이를 주도한 것은 3월 1일의 첫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학생 김원벽(金元璧)과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학생 강기덕(康基德), 그리고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학생 한위건(韓偉健) 등이었다. 이들은 3월 5일 오전 8시 반까지 남대문역 광장에 집합할 것을 결의하였다. 3월 5일 남대문역에 모인 학생 시위대는 그날 아침부터 만세를 크게 외치며 남대문 쪽을 향하여 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정석도(鄭石道)·조무환(曹武煥)·이국수(李掬水) 등 같은 중앙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붉은색 완장을 팔에 두르고 독립선언서와 여러 격문을 남대문역 주변을 오가는 일반 군중에게 배부하였다. 고종 장례를 보고 귀향하고자 하는 남대문역 주변에 모였던 군중들이 시위 행렬에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약 1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시위 행렬은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이때 남대문을 지나 태평통(太平通, 현 태평로), 대한문(大漢門) 앞을 거쳐 보신각(普信閣) 방향으로 향하는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이때 출동한 일제 군경의 무력 진압으로 시위대가 해산되었다. 그 후 고향 옥구 지역에 서울에서의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고 그곳에서 다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자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타러 남대문역으로 갔다가 그 곳에서 일제 경찰에 의해 붙잡혔다. 오랜 조사로 고초를 겪다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미결구류일수 중 90일 본형 산입)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석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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