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德三
德三1904 ~ 1926. 6. 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
- · 병인의용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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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5)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강암동(江岩洞)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904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이영선(李英善)·이영전(李英全)·이수선(李秀善)이다. 부친 이봉조(李鳳朝)의 셋째 아들이며, 동생은 이덕용(李德用)이다. 평북 선천(宣川) 소재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를 다녔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交通局) 전체사(傳遞事)로 활동하며, 임시정부 문서를 국내로 전달하고 『독립신문』을 배포하였다. 임시정부 교통국에서는 한반도 안팎의 독립운동 세력과 일반 행정조직을 연결하기 위해 임시 지방교통사무국을 설치하였다. 교통국은 정보 수집과 행정 연락, 선전과 홍보를 펼쳐 나가기 위한 지역적 연결망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주요 거점에 교통국을 설치하고 통신원을 배치하였다. 이를 통해 한반도에 문서를 전달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중국 상하이(上海)로 운반하였다. 1922년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상하이로 이동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18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상업에 종사하다가 일제 경찰을 처단한 후 북만주(北滿洲)로 건너갔다. 1926년 봄 중국 하얼빈(哈爾賓)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압송되던 중, 중국 창춘(長春)에서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하였다. 골절 부상을 입은 채 상하이로 이동하였다. 상하이에서 의열투쟁 단체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에 합류하였다. 그해 4월 16일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일제 관원을 일본음식점 승전관(勝田館)으로 유인하여 처단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때 교전이 벌어져 다리에 총상을 입고 1개월 남짓 치료를 받았다. 1926년 5월 23일 상하이 병인의용대 고문 나창헌(羅昌憲)의 자택에서 나창헌·김광선(金光善)·고준택(高峻澤)·김석용(金碩龍)과 함께 순종 장례식을 기하여 국내에서 활동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병인의용대 총무 겸 전략참모 강창제(姜昌濟)가 다물단(多勿團) 간부 정인교(鄭寅敎)로부터 폭탄을 확보하였다. 강창제에게 권총과 탄약·폭탄을 전달받았다. 그 해 6월 1일 김광선·고준택·김석용과 함께 상하이에서 국내로 이동하기 위하여 순천호(順天號)에 승선하였다. 독립운동 자금 모집 사령(辭令)을 소지하고 권총으로 무장한 후 폭탄은 빵 속에 은닉하였다. 당시 배에는 이탈리아 총영사 일행이 타고 있었고 수상경찰이 이들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가 황푸탄(黃浦灘) 하류를 지날 무렵 수상경찰이 배를 멈추고 검문을 시작하였다. 검문에서 무기가 발견되어 붙잡혀 일제 경찰에 넘겨졌다. 6월 2일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형무소 제5감방에 일본인 3명과 함께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다. 6월 7일 새벽 1시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일제는 검안을 시행한 후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는데, 시신 사진에서는 고문으로 생긴 상처가 발견되었다. 중국제난회(中國濟難會)에서는 「한국광복운동기실(韓國光復運動紀實)」에서 “시신 사진을 보면 당시 학대당한 진실을 숨길 수 없다”며 일제가 자행한 고문에 대해 비판하였다. 일제는 자살 이전에 진행된 제1회 조사에서 고문을 시인하였고, 청취서에 날인 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시신의 품속에서 “나의 시체는 프랑스 조계(租界) 해동공사(海東公司)에 있는 동생 이덕용에게 인도하여 달라”는 연필로 작성한 유서가 나왔다며 이덕용에게 시신을 인계하였다. 여운형(呂運亨)·안공근(安恭根)·이유필(李裕弼) 등이 장례 준비를 하였다. 1926년 6월 15일 장례가 치러졌으며,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만국공묘(萬國公墓)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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