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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煥

德煥

1877. 10. 25 ~ 1937.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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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德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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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평양(平壤)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평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신민회
  • · 대한협회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조선물산장려회
  • · 민립대학설립기성회

포상 정보

  • · 애국장(2011)

관련 사건

  • · 1919년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1) 1877년 10월 25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융흥면(隆興面) 하처동(下處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기환(李基煥)이다. 1907년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직업은 무역상(貿易商)이었다. 1905년 화폐 정리 사업으로 곤란을 겪었던 평양의 조선인 자본가들을 모아 1906년 평양상업회의소(平壤商業會議所)를 결성하였다. 동시에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장로(長老) 등을 역임하며 기독교인으로서 지역 유지로 활동하였다. 1908년 대한협회(大韓協會) 평양지부 평의원(評議員), 1909년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간행에 의연금을 납부하기도 하였다.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신민회 산하기관으로 서적이나 유인물의 출판과 공급을 목적으로 평양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이 설립될 때, 송종원(宋鍾源)·김근형(金根瀅)과 함께 관여하여 운영을 맡았다. 1908년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平壤磁器製造株式會社)를 설립할 때, 한삼현(韓三賢)·윤재명(尹在明)·정인숙(鄭仁叔)·윤성운(尹聖運)·전재풍(田在豊) 등과 함께 설립자로 참여하였다. 신민회는 1911년 9월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이른바 ‘데라우치(寺內) 총독 암살 미수 사건’(105인 사건)으로 회원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이때 함께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모살미수죄를 이유로 징역 6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결과,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이 취소되고 무죄를 받았다. 일제 검찰이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다시 무죄 판결을 받아 풀려났다. 1919년 3월 1일 평양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의 인쇄·배포와 만세시위에 관여하였다.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같은 해 8월 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평안도 독판(督辦)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독립운동의 역량을 결집시키는 추진체로 중국 상하이(上海)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1919년 7월 10일 국내와의 비밀 연락망 조직의 성격을 지닌 연통제(聯通制)를 시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12월 5일 평안도의 연통제 조직을 책임지는 도장관(道長官)인 독판으로 임명되었다. 1919년 10월부터 임시정부 특파원 최성수(崔性壽)가 임시정부 제47호 신임장과 애구금수령서(愛國金受領書)를 갖고 평양으로 잠입하여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11월 3일경 박영덕(朴永德)과 최종식(崔鍾植)으로부터 의연금(義捐金) 1만 2,000원(圓)을 거두었고, 11월 하순에는 송대헌(宋大憲)으로부터 1,000원을 모집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관련자로, 불구속 상태로 조사를 받았다. 1920년 2월 15일 안동임시교통국장(安東臨時交通局長) 홍성익(洪成益)의 후임으로 활동하던 양준명(梁濬明) 등 여러 사람의 활동이 일제에 의해 발각되면서 평남 독판에 임명되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평안도 독판으로 독립사상을 각 방면에서 선전하고 최종식이 거둔 의연금 가운데 5,000원을 받아 다시 동지인 안국형(安國衡)에게 주어 송금하는 역할을 했던 일로 결국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같은 해 11월 5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2년 2월 2일 가출옥(假出獄) 석방되었다. 1920년 8월 23일 평양에서 창립된 조선물산장려회가 한동안 침체 상태에 있다가 1922년 6월 20일 회장 조만식(曺晩植), 이사 김동원(金東元) 외 9명으로 임원을 구성하며 재발족할 때 부회장을 맡았다. 1924년 민립대학기성회 평양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민족운동 활동 와중에도 기업가로서 1918년에는 장문한(張汶翰) 등과 평양염직소(平壤染織所), 1920년 3월에는 한윤찬(韓允燦) 등과 평양무역주식회사(平壤貿易株式會社), 1927년 7월에는 송재엽(宋在燁) 등과 평양북금융조합(平壤北金融組合) 등을 설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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