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濬鏞
濬鏞1893. 11. 20 ~ 1945.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27결사대
- · 서로군정서
- · 구국모험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3년 11월 20일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고천면(高泉面) 노동리(蘆洞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서우(西愚), 이명은 이석(李錫)이다. 아버지는 이용규(李龍奎)이고, 형은 독립운동가 이탁(李鐸)이다. 14세 되던 해에 평양(平壤) 청산(靑山)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 형 이탁을 좇아 만주로 망명하여 류허현(柳河縣) 제1구(第一區) 야저구(野猪溝)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3년 군자금 마련을 위해 고향에 돌아와 소유 농토를 방매 처리하다가 성천경찰서에 붙잡혀 수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1917년 서울 기독교감리회 중앙신학교(中央神學校)에 재학 중 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그리고 중국 저장성(浙江省) 광동군관학교(廣東軍官學校)에 들어가 군사학과 폭탄제조법을 배웠다. 1918년 말 오적 암살 및 군자금 모금을 위해 만주로부터 국내로 잠입할 27인 결사대의 연락거점 설치를 위해서 귀국하였다. 경의선 숙천역(肅川驛) 앞 냉면집에 연락 거점을 마련하고 활동하던 중, 1919년 1월 성천경찰서 경찰에게 붙잡혔다. 1개월 뒤 석방되자, 다시 만주로 가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여하였다. 서로군정서는 1919년 4월 초순 류허현 고산자(孤山子)에서 이상룡(李相龍)의 주도로 설립된 군정부(軍政府)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1919년 11월 17일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개칭한 단체이다. 이때 서로군정서 의용대장으로 임명되어, 일본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하여 이탁·전두식(全斗湜) 등과 함께 폭탄 수백 개를 제조하였다. 그러나 펑톈성(奉天省) 천성(天成)여관에 두었던 폭탄 1개가 여관에서 폭발하면서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로 상하이(上海)로 도피하였고, 그곳에서 구국모험단장(救國冒險團長) 김성근(金聲根)의 요청으로 모험단의 간부가 되어 폭탄제조 기술자를 양성하였다. 1920년 4월 미국 의원단 내한 때 광복군사령부 결사대가 사용할 고성능 폭탄을 제조하라는 형 이탁의 지령을 받았다. 폭탄을 제조하기 위해 공동조계에서 탄피를 구입하려다가 일본 영사관 밀정의 밀고로 영국 경찰에 붙잡혀 일본에 인도되었다. 같은 해 9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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