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時說
時1892. 2. 25 ~ 1980. 11.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동창학교
- · 대동청년당
- · 일신학교(흥동학교)
- · 배달학교
- · 광한단
- · 보성학교
- · 조선혁명당
- · 한흥학교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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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92년 (음)2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고현면(高峴面) 어호동(漁湖洞)에서 이종빈(李鍾彬)과 조은천(趙銀川)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본명은 이학수(李學洙)이다. 호는 단총(檀叢)·불천(不千)·(佛泉) 등이다. 불교에 귀의하고 받은 법명은 용하(龍夏), 법호는 운허(耘虛)이다. 이광수(李光洙)와는 8촌 형제이다. 1904년 백균행(白均行)의 셋째 딸인 한남(漢南)과 결혼하였다. 어려서 동네 서당인 회보재(會輔齋)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5년부터 1908년 봄까지 가숙(家塾)에서 학문을 이어갔다. 이후 명륜측량강습소와 평양에서 측량법을 익히고 1909년부터 측량기사로 일하였다. 1910년에는 평양 대성중학교에 재학하던 중, ‘105인 사건’ 등으로 폐교되자 귀향하였다. 1912년 6월경 승회균(承晦均)과 도미하기 위해 중국 안둥(安東)을 거쳐 랴오양(遼陽)까지 갔다가 그해 가을 귀향하였다. 1913년 봄 승회균·대성학교 동창인 김규환(金奎煥)·그의 친구인 김진호(金鎭浩) 등과 함께 윤세복(尹世復)이 펑톈성(奉天省) 환런현(桓仁縣)에 건립한 민족학교 겸 대종교 시교당(施敎堂)이던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가 되었다. 이때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1914년 5월 13일 참교(參敎) 교질(敎秩)을 받았다. 동창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윤세복·윤세용(尹世茸)·이극로(李克魯)·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 등과 함께 근무하며 교류하였다. 1913년 여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구체적인 활동상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시기 본명을 이시열(李時說)로 개명하고, 호를 단총(檀叢)이라고 하였다. 1914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이 내린 학교 폐지와 교사 축출령에 따라 동창학교가 폐지되자, 그 해 겨울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1915년 4월 모친과 동생 등을 데리고 중국으로 이주하여 평안도 사람들이 다수 거주하던 흥경현(興京縣) 홍묘자(紅廟子) 하가보(何家堡)에 정착하였다. 김규환·김공제(金公濟)와 함께 일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6년 2월 일신학교는 흥동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18년 봄에는 퉁화현(通化縣) 반랍배(半拉背)에서 배달학교 설립에 참여하고, 문과를 담당하였다. 1920년 (음)9월 23일 ‘경신참변’으로 배달학교 교장 조용석(趙庸錫)·교감 김기선(金基善)·교원 조동호(趙東鎬)와 수 명의 한족회(韓族會) 자치회원 등이 사망하고, 배달학교도 문을 닫았다. 1919년 3월 15일 학감 강화린(姜華麟)과 왕칭먼(旺淸門)으로 이동해 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 『효종(曉鍾)』을 발행하였다. 또한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浦)에 한인공회(韓人共會)가 설립될 때 현익철(玄益哲)·김규환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 해 4월 류허현에서 한족회(韓族會)가 조직되자, 서로군정서에 가담하고 기관지인 『한족신보(韓族新報)』의 사장 겸 주필로 발행을 주도하였다. 1920년 1월경 한족신보사가 중국 경찰에게 인쇄기를 압수당하는 피해를 당하자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그 해 4월 19일 개최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제2회 정기총회에 윤창선(尹昌善)·량기하(梁基河)·김덕원(金德元)·(白鎭海白鎭海)·김유성(金有聲) 등의 내빈과 함께 『한족신보』를 개명한 『새벽달신문(曉月新聞)』의 사장으로 참여하였다. 참석자들과 협의해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이에 복종할 것, 각 지방 단에서 용기 있는 청년을 선발해 의용대를 조직하여 전쟁을 준비할 것, 독립전쟁을 준비할 것, 교통기관을 각 중요 지점에 배치할 것” 등에 대한 내용을 결의하였다. 1920년 콴뎬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서 서로군정서의 소장파인 현정경(玄正卿)·현익철·이호원(李浩源)·홍원경(洪元京)·김석손(金錫巽) 등과 함께 광한단(光韓團)을 결성하였다. 광한단의 단장으로 취임하고 국내에 조직기반·연락망 구축과 군자금 모집을 통해 국내 일제의 행정·군사기관 파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 결사모험대(決死冒險隊)를 국내로 잠입시켰다. 단장제로 운영되던 광한단은 1920년 말 현정경이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위원제로 운영되었다. 이때 계획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2월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하였고, 이광수의 주선으로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한 뒤 1921년 1월경 콴뎬현으로 돌아왔다. 그해 2월 국내 활동을 위해서 조우석(趙祐錫)이라는 가명으로 잠입하였으나, 사촌에게 쓴 편지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쫓기게 되었다. 다시 이름을 박용하(朴龍夏)로 바꾸고, 금강산으로 가던 중 강원도 회양군(淮陽郡) 난곡면(蘭谷面)에 위치한 유점사(楡岾寺)의 말사인 봉일사(鳳逸寺)로 피신하였다. 같은 해 5월 경송(慶松) 은천선사(銀天禪師)에게 사미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이후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奉先寺)에서 월초(月初)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27년 개운사(開運寺)에서 이순호(청담) 스님 등과 불교 현대화를 협의하였다. 1928년 전국강원학인대회를 소집하고, 그 상설 기관으로 조선불교학인연맹을 조직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일제에게 민족운동 혐의를 받자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9년 4월 다시 퉁화현 반랍배로 가서 보성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해 12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 가입하였다. 1930년 가을부터 흥경현 영릉가(永陵街)의 한흥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31년 현익철의 체포로 조선혁명당이 다시 정비될 때 교육부 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한흥학교 교사를 사임하였다. 1932년 1월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의 주요 간부 6명이 붙잡힌 ‘신빈(新賓)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흥경현의 동생 집에 은신하다가 다시 봉선사로 귀환하였고, 1940년대까지 봉선사에서 시무하였다. 광복 이후 재건된 조선혁명당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곧 정치활동을 중단하였다. 1946년 여러 사찰 소유의 전답 약 59만평과 임야 약 1,500정보 등을 출연하여 광동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1946년 대종교가 국내에 설립한 종학연구회(倧學硏究會)·종리연구실(倧理硏究室) 등의 기관에 참여하였고, 1950년대 후반까지 대종교 관련 출판 작업을 주도하였다. 1953년 김승학(金承學)·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편찬을 시작하여 1954년 초고를 완성하였다. 1964년 동국역경원 창설하고 초대원장으로 취임하였고, 이후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한글 번역을 지속적으로 주도하였다. 1970년 봉선사의 대웅전을 중건하면서 우리나라 사찰 법당 가운데 최초로 서예가 금인석이 한글로 쓴 ‘큰법당’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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