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48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유신회
- · 자신회
- · 대종교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관련 사건
- · 을사오적 처단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8) 전라북도 김제군(金堤郡) 성덕면(聖德面) 대석리(大石里) 출신이다. 1907년 판결문에 당시 나이가 60세로 기록되어 있어, 1848년생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자는 백증(伯曾)이고, 호는 해학(海鶴)·질재(質齋)·재곡(梓谷)·효산자(曉山子)·남악거사(南嶽居士)이며, 이명은 이기(李綺)이다. 가난한 양반 가문에서 이택진(李擇振)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7세에 사숙을 입학하고 13세까지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15세에 향시(鄕試)에 응시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실학(實學)을 연구하여 유형원(柳馨遠)·정약용(丁若鏞) 등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1876년 생활고로 진안(鎭安)으로 이사하였다. 1879년 부친상을 당한 후, 1882년부터 약 10년 동안 김제·대구(大邱)·순창(淳昌) 등지를 유랑하면서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1893년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권유로 구례(求禮)로 이사하고 그곳의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全琫準)을 찾아가 “조정을 타도하고 국헌(國憲)을 일신할 것”을 건의하여 동의를 얻었으나, 김개남(金開男)의 반대에 부딪혀 구례로 돌아왔다. 도리어 동학군에게 쫓겨 마을에서 자위대를 조직해 방어하였다. 1895년에는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의 초청을 받아 토지정책 자문을 하며 토지개혁정책을 건의하였으나, 반영되지는 않았다. 1899년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할 때 양무위원(量務委員)으로 충남 아산(牙山)의 토지를 측량하는 등 근대적인 지세제도 마련에 노력하였다. 1900년부터 각종 개혁책과 건의서·항의서 제시를 통해 구국을 위한 자강책(自强策)을 계속해서 건의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와중에 일본이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를 규탄하는 선언서를 발표하는 한편 「논일인소구진황지소(論日人所求陳荒地疏)」 등 상소를 4차례 올려 황무지개척권 강요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대책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보안회(保安會)를 조직하고 일본을 배척하는 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나철(羅喆)·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비밀결사단체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다. 1905년 6월에는 나철·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국제 여론을 파악하고 외교항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당시는 가쓰라-태프트밀약과 포츠머스조약 체결을 앞두고 있는 시점으로 한국 문제가 불리하게 전개될 것을 예상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 여론에 호소하여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을 찾아가 이 문제를 협의하여 대한제국의 정식대표로 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주선을 요청하였다. 이하영이 반대하자 나철과 함께 포츠머스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청원서를 외부(外部)에 제출하고 대미외교항쟁(對美外交抗爭)을 시도하였으나,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방해 책동으로 무산되었다. 이에 더욱 적극적인 방략으로 전환하여 나철·오기호 등과 함께 한국 침략 당사국인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4차례에 걸친 대일외교 항쟁을 전개하였다. 1905년 7월 26일 제1차 대일외교항쟁을 실행하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일제의 저지망을 뚫고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일행과 함께 한국 침략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臣)·모치즈키 류타로(望月龍太郞) 등을 차례로 만나, 동양평화를 위해서는 한·중·일 삼국이 동맹하여야 하며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린(善隣)의 교의(交誼)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이토 히로부미와 일왕(日王)에게 격문을 보내 평화조약 준수를 촉구하고, 일본의 한국 침략이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무익한 처사로 이를 지양하고 양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충고하였다. 일행과 일본에서 대일 외교항쟁을 전개하던 중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외교항쟁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1906년 1월 24일 귀국하였다. 귀국 후 한성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언론을 통해 국권수호와 제도개혁에 관한 주장을 펼쳤다. 1906년 경에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고, 기관지인 『대한자강회월보』 간행에 노력하였다. 또한 계몽잡지인 『조양보(朝陽報)』·『야뢰보(夜雷報)』 등에 서문과 논설을 게재하며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2월 3일에는 나철 등과 함께 ‘을사오적 처단의거’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비밀결사단체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였는데, 단원은 200여 명에 달하였다. 이어서 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김동필(金東弼)·이용채(李容彩) 등과 상의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며,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고 ‘을사오적 처단의거’를 결의하였다. 모금된 거사 자금으로 김동필이 인천에서 권총 50정을 구입하고, 거사일을 1907년 2월 13일로 정하였다. 거사일로 정한 2월 13일은 (음)1월 1일로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진하(陳賀)차 입궐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경계 강화로 지방에서 모집한 결사대원들이 서울로 집결하지 못하자, 박대하가 거사일을 3월 25일로 연기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서창보(徐彰輔)가 체포되어 일제의 고문에 못 이겨 거사 전말을 실토하면서 동지들도 차례로 붙잡혔다. 그러자 자발적으로 일제 수사기관에 출두하였고, 1907년 7월 3일 평리원에서 이른바 모살죄로 유형(流刑) 5년을 받아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12월 고종의 특사로 유배 4개월만에 나철·오기호 등과 함께 풀려났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호남학회(湖南學會) 교육부장이 되었고, 『호남학보(湖南學報)』의 고정 필자로 참여하여 민중계몽운동에 매진하였다. 1909년 (음)1월 15일에는 나철·오기호 등과 함께 서울 제동(齋洞)에 모여 단군교를 ‘중광(重光)’하였다. 단군교 중광에 참여한 인사는 대일 외교항쟁을 전개한 인사와 을사오적 처단 의거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단군교 중광을 위해 모인 인사들은 취운정(翠雲亭) 아래 6칸 초옥(草屋)의 북벽(北壁)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檀君敎布明書)’를 공포하였다. 저서로 『해학유서(海鶴遺書)』와 『해학유고(海鶴遺稿)』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동언⋮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