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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文祚

文祚

1902. 6. 21 ~ 1971.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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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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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울산(蔚山)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울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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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1919년 울산군 하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902년 6월 21일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하상면(下廂面) 서리(西里, 현 울산광역시 중구 서동)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0년대 비밀결사 병영청년회(兵營靑年會)의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울산군 하상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0년대부터 비밀결사인 병영청년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19년 3월 서울의 학교에서 재학 중에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한명조(韓命祚)·이영호(李永浩) 등으로부터 만세운동의 상황을 상세히 전달받았다. 또한 4월로 접어들면서 인근의 여러 군, 면에서도 연이어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독립의 시기가 왔다가 판단하여 이현우(李鉉禹)·이종욱(李鐘旭)·박영하(朴永夏)·이종근(李鐘根) 등 병영청년회의 동지들과 하상면의 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박영하와 이종근의 집 등에서 여러 차례 논의를 거듭하여 만세운동의 거사일을 4월 4일로 결정하고, 동지들과 오른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깨물어 ‘결사보국(決死報國)’을 혈서로 서명하여 만세운동을 성공을 다짐하였다. 이후 만세운동 하루 전인 4월 3일부터 구체적인 만세운동 준비에 착수하였다. 비밀리에 박영하의 집에서 모여 독립선언서 200장을 인쇄하고, 명주천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대를 선도할 ‘독립만세’·‘대한독립만세’ 등의 문구를 큰 글씨로 쓴 대형 깃발을 제작하였다. 만세시위에서 주민들에게 배포할 태극기는 양석룡과 이종룡(李鐘龍)이 담당하여 500장을 제작하였다. 4월 4일 오전 9시경, 병영청년회의 동지들과 함께 사립 일신학교(日新學校)로 갔다. 11시 40분경,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높이 차올린 것을 신호로 양석룡이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깃발을 들어 올리자, 병영청년회의 회원들을 비롯하여 일신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품속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현우·이종욱 등과 함께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시위대를 지휘하여 서리·동리(東里)·남외리(南外里)·산전리(山田里) 등 하상면의 각 지역으로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연창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청년, 학생들의 만세시위에 공감한 많은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시간이 갈수록 확대되었다. 청년과 학생들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울산경찰서장을 비롯한 일제 경찰과 수비대가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를 거부하고 시위대가 만세시위를 계속 하자, 일제 경찰은 강제 해산을 시도하였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을 지휘하여 일제 경찰들과 격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양석룡·이종욱·이종룡 등 14명이 체포되어 울산경찰서로 연행되고, 이날의 만세시위는 해산되었다. 만세시위는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체포되지 않은 이종필·이종근(李鐘根)과 함께 김세진(金世鎭)의 집에 모여 다음날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때 문성초(文星超)·윤학이(尹學伊)·최현구(崔鉉玖)·황정달(黃丁達)·백봉근(白鳳根) 등이 새롭게 동지로 규합되었다. 이들과 함께 4월 5일 아침부터 전날의 만세시위 소식과 일제 경찰들의 폭력 진압에 대한 소식을 접하여 분노한 주민들이 일신학교로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그 규모는 수천 명에 달하였다. 동지들과 다시 일신학교 부근에 모여 오후 3시부터 ‘대한독립만세’라고 큰 글씨로 쓴 현수막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종필·이종근 등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하여 일제 경찰의 주재소에 결집하여 구속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과 수비대가 출동하여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의 선두에서 일본 경찰과 수비대에 저항했던 엄준(嚴俊)·문성초·주사문(周士文)·김응룡(金應龍) 등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양석룡·최현구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했으나, 같은 해 5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징역 2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했으나, 그해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1년 풀려난 후, 만세시위의 동지들과 함께 ‘기미계(己未契)’를 조직하여 광복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할 것을 서로 맹세하였다. 지역에서 야학운동과 계몽활동을 전개하면서 신간회(新幹會) 울산지회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형이 울산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되면서 국민보도연맹 울산희생자유족회 회장을 맡아 희생자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로 인하여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이미 고령인데다 하상면 독립만세운동의 공적이 반영되어 같은 해 겨울 군사재판에서 기소 유예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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