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奉植
奉植1896. 6. 25 ~ 1934. 7. 2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칠의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은율군 장련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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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6년 6월 25일 황해도 은율군(殷栗郡) 장련면(長連面) 동부리(東部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봉석(李奉錫)이다. 1919년 3월 12일 은율군 장련면 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1923년 칠의회에 가입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초순부터 은율군 장련면에서는 개신교도·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장련면 읍내 예수교 교회 소속의 유원식(柳元植)은 일도면(一道面) 누리(樓里) 예수교회의 임국승(林國承)을 비롯해서 박경준(朴景俊)·오윤화(吳允和)·최태영(崔泰永)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한편, 장련면 일대의 개신교 교회에 연락해서 독립만세 참여를 독려하였다. 동부리(東部里)에 사는 김일영(金一泳)은 읍내에 거주하는 김처곤(金處坤)의 집에서 학생 10여 명과 함께 태극기 8장을 제작하고, 여백에 ‘대한국 만만세’, ‘우리 동포는 독립권을 획득했다’ 등의 글을 적었다. 그리고 읍내 주민들이 이를 보고 만세운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읍내 게시판과 장련보통학교 교문 앞을 비롯하여 읍내 곳곳에 태극기를 부착하였다. 일제 관헌이 김일영 등의 움직임을 포착해서 그들을 체포하였음에도 읍내 만세운동의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3월 8일 동부리 청년 유원식은 독립선언서 1장을 사립숭실학교(私立崇實學校) 교사 김창덕(金昌德)에게 보내면서 등사 인쇄를 부탁하였다. 이에 김창덕은 같은 날 저녁 독립선언서를 인쇄해서, 3월 10일 오전 9시 무렵 유원식에게 건네주었다. 3월 11일 개신교 학생들은 장련면에서 독립선언서를 사람들에게 배포하다가 일제 관헌들에게 압수당하였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장련면의 만세운동은 장이 열리는 3월 12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월 12일 장련 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다. 장련면을 비롯해서 일도면과 이도면(二道面) 주민들도 만세시위에 합세해 시위대의 규모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시위대 선두에 서서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장련면 화천리(花川里)에 사는 사립학교 교사 정재염(鄭在炎)과 일도면 누리에 거주하는 사립진명학교(私立進明學校) 교사 임창연(林昌椽)도 시위대의 선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장련면 헌병대는 송화읍 헌병대와 합세해서 만세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면서, 오후 2시경 19명의 주도자를 연행하였다. 이후에도 일제 군경은 만세시위를 주도했거나 관련된 인사들에 대한 대규모 색출 작업을 통해 총 47명을 연행하였다. 이때 장련면 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일제 군경에게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3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1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조선의 민성(民性)이 소멸하지 않았으며 정의와 인도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했기에 무죄”라고 주장하면서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8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1년 12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으며, 2년 후 귀국해서 박경준(朴景俊)이 조직한 칠의회(七議會)에 가입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붙잡혔다. 1930년 8월 19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주거침입죄, 건조물 소훼죄, 방화미수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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