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柏夏
柏夏1899. 4. 17 ~ 1985. 2. 1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천안군 갈전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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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9년 4월 17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성남면(城南面) 신덕리(新德里)에서 태어났다. 지역의 대표적인 유림(儒林)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葛田面) 병천리(竝川里, 현 병천면 병천리)의 아우내 장터(竝川市場, 병천시장) 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는 병천 지역과 수신면(修身面) 지역의 만세운동 준비가 하나로 합쳐져 대규모로 발전되었다. 지역의 대표적인 유림이면서 기독교계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두 지역의 만세운동 계획에 동시에 참여하면서, 양쪽 모두 비밀을 유지하였다. 3월 13일 서울에서 유관순(柳寬順)과 유예도(柳禮道)가 귀향하면서 병천 지역의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3월 16일 병천 지역 인사들과의 모임에 유중권(柳重權)·유중무(柳重武)·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유중무의 딸 유관순으로부터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는 만세운동 상황을 상세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참석자 모두 만세시위 추진에 적극 찬성하면서 시위를 준비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곧바로 만세시위 거사일을 아우내 장터의 장날인 4월 1일로 정하였다. 수신면과 성남면 지역에서의 만세운동 계획은 유림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고종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만세운동을 몸소 겪고 귀향한 이순구(李旬求)를 시작으로 김교선(金敎善)·홍일선(洪鎰善) 등이 중심이 되었다. 3월 29일 연락을 받고, 박영학(朴永學)·한동규(韓東圭)와 함께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교선·홍일선·이순구로부터 만세시위 제안을 받고, 즉시 동의하여 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모임에서도 만세시위의 거사일을 아우내 장터의 장날인 4월 1일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아우내 장터를 중심으로 하는 2개의 만세시위 계획에 모두 참여하였으나, 일제 경찰에게 계획이 사전 발각될 것을 우려하여 엄격히 비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 병천 만세시위가 하나로 합쳐지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3월 31일 밤 매봉산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 수신면 산마루, 충북 진천(鎭川)의 고갯마루 등에서 봉화가 올랐다. 이것은 다음날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예정대로 전개할 것이라는 최종 신호였다. 4월 1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장터의 입구에서 사람들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오후 1시 조인원이 장터의 한가운데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힘껏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것을 계기로 주변에서 만세시위의 시작을 기다리던 주민들이 일제히 함께 품속에 감추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병천헌병주재소의 일제 헌병들이 곧바로 출동하여 시위 해산을 명령했으나, 시위대는 해산에 불응하고 더욱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수천 명이 동시에 외치는 구호에 당황한 일제 헌병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시작하였고, 곧이어 김상헌(金相憲)이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철수하는 일제 헌병들을 쫓아갔고, 주재소 공격에도 참여하였다.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일제 헌병의 발포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며 책임 추궁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도 일제 헌병이 또다시 발포하여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이 사망하였다. 만세시위에 나선 사람들이 계속 희생이 되는 상황에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기에 100여 명의 주민들을 이끌고 주재소로 쳐들어가 유치장 벽을 부수고 구금자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주재소 건물의 뒷담을 허물고,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주재소 대부분을 파괴하였다. 병천헌병주재소의 병력만으로 만세시위를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제 당국은 천안에서 철도엄호대를 아우내 장터으로 파견하였다. 병천헌병대와 철도엄호대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여 만세시위를 강제 해산시키고, 만세시위 참여자들을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중 소요죄 부분은 취소되었으나, 징역 2년을 재차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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