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發榮
發榮1880. 7. 24 ~ 1949. 4. 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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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0년 7월 24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성무(李聖武)이다. 1919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그 해 4월 1일 안성면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의 주민들이 함께 일으킨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원곡면에서는 3월 28일부터 연일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는데, 4월 1일에는 양성면의 주민들이 원곡면의 주도로 연합하여 약 2,000명 규모의 시위대를 이루어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오후에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등으로부터 만세를 부르자는 제안을 받고, 이에 공감하여 이병문(李丙文)·이병오(李丙五) 등 주민들과 함께 원곡면 면사무소 앞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유석·홍창섭·최은식(崔殷植) 등의 지휘에 따라 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여 큰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이 과정에서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들도 만세시위에 참여시켰다. 이때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이 위치한 양성면의 주민들과 연합하여 시위를 전개할 목적으로 시위대와 함께 횃불을 밝히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한편, 양성면의 주민들도 이날 밤 9시 경부터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이 해산할 무렵, 원곡면의 시위대가 양성면으로 오면서 두 지역의 주민들은 연합하여 더욱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렇게 확대된 시위대는 약 2,000명의 규모가 되었다. 대규모 시위대와 함께 우선 주재소로 가서 만세를 부른 뒤, 돌을 던져 주재소의 유리창 등 공격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놀라서 일제 경찰들이 도주하자 주재소 건물을 소실시켰다. 이후 양성우편소와 양성면사무소, 그리고 일본인의 상점 등 곳곳을 공격하며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해산하였다. 시위 이틀 후인 4월 3일 일제는 조선주차군 제79연대 30여 명의 병력을 원곡·양성 지역으로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붙잡혀 안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후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이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을 선언함에 따라 실제 재판은 만세시위로부터 거의 2년이 지난 뒤 이루어졌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죄 등을 위반한 혐의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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