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萬儀
萬儀1880. 2. 28 ~ 1959. 5.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3월 임실군 둔남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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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0년 2월 28일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둔남면(屯南面) 신기리(新基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고향에서 농업(農業)에 종사하였으며, 같은 해 3월 23일 임실군 둔남면 오수장터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고종(高宗)의 장례와 만세운동을 목격한 이기송(李起松)은 임실군 자택으로 돌아와 뜻을 같이하는 주민들과 함께 둔남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이때 이기송의 제안을 받아 함께 둔남면 일대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이기송 등 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한 동지들과 함께 오수리(獒樹里) 장터로 이동하였다. 오후 2시에 이기송이 오수장터에 모인 주민들에게 파리강화회의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독립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였다. 연설이 끝나자, 여러 시위 주도세력과 함께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오수장터에서 나온 주민들이 합류하여 시위 규모가 약 2,000명으로 늘어났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오수장터를 행진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은 시위를 주도하던 이기송을 체포하여 오수경찰관주재소(獒樹警察官駐在所)에 구금하였다. 그러자 성난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이동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기송의 석방을 촉구하였다. 이어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 내부로 들어가 유리창과 각종 기물 및 유치장을 파괴하였고, 결국 주재소 주임 촌정(村井) 순사는 이기송을 풀어줬다. 당시 시위대가 주재소에 진입했을 때 일제 순사보가 총을 겨누며 시위대의 주재소 진입을 막자, 일부 군중과 함께 휴대한 총을 빼앗고 심한 구타를 가하였다. 이기송을 구출한 시위대는 뒤이어 둔남면사무소(屯南面事務所)로 쳐들어가 둔남면장 이창의(李昌儀)와 면서기 임상학(林相學)에게 함께 만세를 부르라고 하였고, 둔남면 일대의 일본인 가옥과 상점을 파괴하였다. 이때 앞장서서 시위대의 기세를 북돋고, 만세시위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오후 4시에 임실경찰서(任實警察署)와 남원헌병분대(南原憲兵分隊)의 무장 군경이 오수장터로 출동해 총을 발포하여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하지만 시위대는 밤늦게까지도 산발적으로 흩어져 만세를 불렀고, 격렬했던 오수장터 만세시위는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만세시위가 끝난 후, 일제 군경의 시위 주도 인사 검거 작전으로 붙잡혔다. 이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오랜 조사와 재판 끝에 1920년 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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