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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斗炯

斗炯

1894. 11. 3 ~ 1919.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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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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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양양(襄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강원도 양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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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1919년 양양군 양양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3) 1894년 11월 3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양양면(襄陽面) 서문리(西門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4일 양양면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붙잡혔다. 양양군에서 만세운동의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1919년 3월 말경으로, 기독교 계열과 유학자 계열에서 적극적으로 나섰다. 기독교 계열에서는 양양교회 소속 청년들이 중심이 되었고, 유학자 계열에서는 대한제국기에 의관(議官)을 지낸 이석범(李錫範)을 중심으로 함평이씨(咸平李氏) 가문에서 주도하였다. 양양교회 청년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는데, 그들에게 영향을 준 인물은 전도사 조영순(趙永淳)의 딸 조화벽(趙和璧)이었다. 조화벽은 개성에서 만세운동을 경험하고 귀향하였는데, 이때 독립선언서를 숨겨 와서 김필선(金弼善)에게 전달하였다. 당시 양양면사무소 직원 김필선은 동창생과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이에 김재구(金在龜)·김규용(金圭容)·김계호(金啓鎬) 등과 함께 참여하였고, 4월 4일 양양읍에 장이 서는 것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다른 동지들과 양양읍 만세운동을 위하여 비밀리에 만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한편, 유학계열에서는 이석범이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가져온 독립선언서가 계기가 되어 만세운동을 계획하였고, 기독교계가 거사일로 정한 4월 4일 같은 날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함평이씨 집성촌인 임천리(林泉里)의 이교완(李敎完) 집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최인식(崔寅植)과 김명기(金命基) 등 양양보통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청년들을 모아 태극기를 만드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거사를 하루 앞둔 4월 3일, 김필선·김재구 등이 임천리에 있는 최인식을 방문하여 다음날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음을 알리면서 두 계열은 손을 잡았다. 이로써 만세운동 준비는 더욱 활기를 얻게 되었고, 양양면 뿐만 아니라 이웃한 서면(西面), 손양면(巽陽面) 등 여러 마을에 책임자를 두면서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기독교 계열도 임천리에서 함께 시위 준비를 하며, 제작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여러 마을에 배부하였다. 4월 3일 저녁, 율계(律契)을 위장하여 만나 자리에서 주도 인물 수십 명이 태극기를 만들고 있을 때, 양양군수 이동혁(李東赫)이 군속 심운택(沈雲澤), 일제 관헌들을 앞세우고 갑자기 임천리에 들이닥쳤다. 이동혁은 그 자리에서 태극기 등 374장을 빼았고, 이석범·이건충(李建忠) 등을 체포하였다. 당시 성내리 북문 너머에 있는 상여 곳집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있었는데, 이를 눈치 챈 경찰이 급습하면서 현장에서 붙잡혔고 태극기는 압수되었다. 모진 조사를 거친 후 태형(笞刑)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여독으로 그 해 4월 9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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