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斗烈
斗1888. 7. 3 ~ 1954. 1. 1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군산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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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8년 7월 3일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 억기면(檍岐面) 율산리(栗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岩里)에 거주하였으며, 영명학교 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3월 6일 군산부 장터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1919년 파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강화회의가 열리자, 국내에서 독립선언서 선언과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족대표에 참여하게 된 이갑성(李甲成)을 통해 영명학교 출신으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던 김병수(金炳洙)가 옥구에 방문했을 때, 만세운동 계획을 사전에 인지하게 되었다.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朴淵世)는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만세시위 준비에 착수하였다. 박연세는 군산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하라는 이갑성의 말을 실천에 옮기는 일을 진행하였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박연세·김수영(金洙榮), 교회부속여학교 교사인 고석주(高錫柱) 등과 함께 회의를 가졌다. 이에 3월 6일 장날을 기해 군산부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만세시위를 추진하기 위해서 예수교병원 사무원인 이준명을 비롯해서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과 군산예수교 신자들, 영명학교 학생들에게 3월 6일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박연세 등과 함께 영명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도록 하였다. 3월 5일까지 학교의 등사판을 사용해서 독립선언서를 수천 장 인쇄하였고 이는 주변 지역으로 배포되었다. 이상과 같이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중, 3월 5일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3월 6일 군산부 만세운동은 계획에 그쳤고, 대신에 영명학교 학생들 주도로 군산부 시내 만세시위가 3월 5일 밤에 바로 이루어졌다. 1919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며, 같은 해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중 일부 취소되고 징역 3년을 다시 받았다. 이에 “조선은 반만년 역사를 가진 독립국으로 고대부터 문명한 자치민족이기에 독립과 자족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은 위법한 일이 아니며, 조선과 일본은 순치(脣齒)의 형세를 갖고 있는 이웃국가로서 조선민족과 일본민족은 동화도 어렵과 병합하면 불화가 끊이지 않아서 두 민족 모두 망하는 화근이기에 동양평화의 근본적 해결책은 조선의 독립임에 분명하기에 세계평화의 대세에 따라서 동양평화의 장래를 도모하기 위해서 자국 독립을 요구한 것은 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상고하였다. 그해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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