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龍潭
潭1894. 3. 4 ~ 195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 · 광복군
- · 통의부
- · 정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4년 3월 4일 평안북도 삭주군(朔州郡) 삭주면(朔州面) 동부리(東部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 한 이용담(李龍淡·李龍談)을 썼다. 1919년 만주로 이동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광복군(光復軍)·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정의부(正義府) 등 독립군단에 가담하여 국내진입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15일 의병출신 인사들이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한 독립군단이다. 대한독립단 초창기 단원으로 참여하여 국내특파원에 임명되었다. 1919년 말 대한독립단이 분화하는 과정에서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2월 콴뎬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서 민국독립단 지도부들은 같은 서간도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던 대한청년단연합회와 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府) 간부들과 통합을 위한 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이듬 해 초 이들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기관인 광복군을 성립시켰다. 광복군은 부속기구로 참리부·사령부·군영(軍營)을 설치하였다. 군영은 6개 영(營)으로 편성되었는데, 이 중 영장 변창근(邊昌根)이 이끄는 제1영 2중대 소속이 되어 국내특파원의 임무를 맡았다. 1922년 8월 광복군 소속의 주상옥(朱尙玉)·김택수(金澤秀)·정창화(鄭昌和) 등과 유격대를 구성하여 국내로 진입하였다. 유격대는 먼저 삭주군으로 이동하여 대관면(大館面) 소재 일제 경찰주재소를 습격해 큰 피해를 입히고, 추격대가 쫓아 오기 전 신속히 창성군(昌城君)으로 이동하였다. 창성군에서도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철수하였다. 두 곳의 경찰주재소 습격 작전에서 일제 경찰 4명을 처단하였다. 1922년 8월 30일 17개 남만주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 조직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되자 대한통의부 소속 의용군 제5중대에 편입되었다. 1923년 6월 중순 박이윤(朴以倫)·김병규(金炳奎) 등 7명과 유격대를 구성하여 국내로 진입하였다. 의주군(義州郡)으로 들어 온 유격대는 6월 20일 일제 의주경찰서 관할 영산주재소(永山駐在所)를 기습 공격하여 일제 경찰 2명을 처단하였다. 1924년 8월 4명의 동지와 유격대를 구성하여 국내로 진입하였다. 의주군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일제 경찰 2명을 처단하고 만주의 본부로 귀대하였다. 남만주 지역에서 통의부를 비롯한 8개 단체들의 통합운동으로 1924년 11월 정의부가 출범하였다. 정의부 의용군의 일원이 되어 1925년 (음)7월 중순 2명의 동지와 유격대를 구성하여 국내로 진입하였다. 의주군 광평면(廣坪面)·고녕삭면(古寧朔面) 일대에서 일제 밀정을 처단하고 친일 부호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6년 (음)6월 의용군 제5중대 참사 홍학순(洪學淳)과 대원 이창일(李昌一)과 함께 유격대를 결성하여 국내로 진입하였다. 의주군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8년 말 콴뎬현 나한구(羅漢溝)의 자택에서 권총 3자루를 소지하고 독립군 파견대가 있는 강하구(江河溝)로 가던 도중 중국군의 검문을 받고 붙잡혔다. 1929년 1월 일제의 신의주경찰대에 인계되었다. 그해 2월 2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항소하였으나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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