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容甲
容甲1884. 7. 25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부민단
- · 한족회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0) 1884년 7월 25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읍동면(邑東面) 동산동(銅山洞)에서 태어났다. 만주로 이주하여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거주하였다. 1916년경 부민단(扶民團)의 회계로 항일활동을 시작하였고, 이후 한족회(韓族會),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제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 독립공채 모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부민단은 1912년 서간도 한인사회 최초 자치단체인 경학사(耕學社)를 이어 설립된 단체이다. 최고책임자인 총장에 이탁(李沰)이 선임되었고, 그 아래 의사(議事)·재무·검찰·학무·사판(査判) 등의 부서를 둔 본부 조직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본부와 떨어진 류허·퉁화(通化)·싱징(興京) 등의 지역에 지방조직인 총관(總管)을 설치하였다. 이때 부민단에 가입하여 재정적 실무자인 회계로서 이주 한인의 생계를 도모하고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간도 독립운동계는 독립전쟁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감지하였다. 이에 같은 해 4월 부민단을 한족회로 확대·개편하였다. 한족회는 부민단의 총장이었던 이탁을 중앙총장으로 선임하였고, 총장을 지원할 중앙위원회를 구성하여 이상룡(李相龍)·박건(朴健)·주진수(朱鎭洙) 등 11명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 총무·학무·외무·사판·검무 등의 부서를 편성하고, 독립운동을 총괄해 이끌어 갈 군정부(軍政府)를 설치하였다. 이때 한족회에서 회계와 서기를 맡아 조직의 내실을 다졌다. 한편, 1919년 4월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와 연결할 수 있는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하면서 평북독판부를 설치하였다. 이때 평북독판부의 모집위원을 맡아 국내 사정을 파악해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것과 군자금을 모집하는 것을 주 업무로 수행하였다. 1920년 1월 안정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고자 관동(關東) 지역에 정미소를 세우고자 시도하였다. 독자적으로 설립하기에는 자금이 부족하였고, 이에 관동에서 여관업을 하는 사람과 펑톈(奉天)의 한국인 부호 등과 동업하여 정미소를 설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같은 달 말경 이 계획이 일제에게 포착되어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독립공채를 소지하고 국내로 진입해 평북 의주군 고관면(古館面) 중곶동(中串洞)으로 갔다. 동지 유효화(劉孝華)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김치련(金致連)·김덕희(金德熙)·김정석(金鼎錫) 등과 함께 의주군 일대를 돌며 부호들에게 독립공채를 매매해 다액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던 중 동지 김창곤(金昌坤)이 철산군(鐵山郡) 백양면(栢梁面) 경찰관주재소에 근무하는 한국인 순사 김의주(金義柱)가 독립군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김창곤에게 동지 몇 명을 대동하여 그를 처단하라고 지시하며 무기를 건넸다. 김창곤 등은 즉시 작전을 수행하여 김의주를 처단하였다. 국내에서 목표액이 어느 정도 모집되자 다시 압록강을 넘어 안둥현(安東縣)으로 가 의주에서와 같은 형식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확보한 자금의 일부는 임시정부로 보내고 일부는 한족회 운영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 일로 1921년 3월 초 콴뎬현(寬甸縣)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이후 감형되어 1928년 9월 28일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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