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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丙五

丙五

1877. 5. 23 ~ 1948.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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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丙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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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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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7년 5월 23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이성필(李聖弼)·이병호(李炳浩)를 사용하였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그 해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양성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의 두 지역 주민들은 대대적인 연합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만세운동은 일제가 ‘내란죄(內亂罪)’를 적용하려고 했을 정도로 만세운동의 전과정에서 가장 격렬하면서도 대표적인 만세시위였다. 이 만세운동에 동생 이병문(李丙文·李聖道)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원곡·양성 지역 만세운동은 3월 11일 양성면에서 먼저 일어났으며, 3월 28일부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는 연일 계속하여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지속적인 만세운동의 흐름은 4월 1일 원곡면의 주도로 두 지역에서 2,0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매우 격렬한 대규모 연합 만세시위로 확대·발전되었다. 4월 1일 오후부터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과 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竹栢里, 현 平澤市· 竹栢洞)의 이양섭(李陽燮) 등의 주도로 원곡면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오늘 밤 모두 면사무소로 가서 만세를 부르자”라는 홍창섭의 호소에 호응하여 동생 이병문 등 마을의 주민들과 함께 원곡면 면사무소 앞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에는 원곡면 대부분의 지역에서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하여 만세시위의 분위기는 매우 고조되고 있었다.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을 끌어내 그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시위대의 위세에 눌린 면장 이하 면사무소 직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만세시위의 기세는 더욱 고조되었다.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기세를 몰아 양성면의 주민들과 연합시위를 계획하여 만세시위대를 향해 “양성으로 가자”라고 외쳤다. 이에 다른 주민들과 함께 적극 호응하여 횃불을 밝히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면장 남길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이유석 등의 주도자들은 시위대의 행렬이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성은고개에 다다르자, 만세시위의 분위기를 재정비하기 위해 행진을 잠시 멈추고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유석이 먼저 주민들 앞으로 나와 “여러분 우리는 양성주재소로 가서 일본순사들을 끌어내어 같이 대한 독립만세를 외칩시다”라고 연설하였다. 이후 홍창섭 등이 서로 번갈아가며, “대한의 독립국이 생기면 일본의 야만적 식민정책을 수행하던 관청은 필요없소.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앞잡이인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은 모두 때려 부숴야 한다”, “양성읍내에 있는 일본인도 모두 쫓아 버려야 한다”, “여러분은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활동하라”라는 등의 내용을 연설하였다. 이에 다른 주민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주변에서 잡히는 대로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준비하고, 다시 이유석 등 주도자들의 지휘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이 위치한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당시 양성면의 주민들도 이미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일제 경찰주재소 앞에 모인 수백 명의 양성면 주민들은 이날 밤 9시 경부터 일제 경찰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한동안 전개하였다. 양성면의 주민들은 성은고개에서 횃불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양성면 쪽으로 행진해 오는 원곡면의 시위대를 목격하고, 이들과 합류하여 더욱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두 지역의 주민들이 합류함에 따라 벅찬 감격에 양성면의 주민들과 얼싸안고 “이제는 독립이 되었다”라고 기뻐하며, 더욱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대는 2,000여 명의 대규모 만세시위로 확대되었다. 이때 이유석 등의 지휘에 따라 먼저 일제 경찰의 주재소로 행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후,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동생 이병문 등과 함께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투석전을 전개하고, 일제 경찰들이 시위대의 규모에 놀라 도주하자, 주재소 건물 전체에 불을 질러 완전히 소실시켰다. 이후 이유석 등 주도자들의 지휘에 따라 일제의 통신기관인 우편소를 습격하여 집기들을 다 들어내서 불태우고, 전신선을 절단하였다. 또한 양성면 면사무소로 들어가 호적원부를 꺼내어 소각하고, 주변에 거주하는 평소 악질로 이름난 일본인들의 주택까지 공격하는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해산하였다. 이후 일제는 제79연대 30여 명의 군대를 원곡·양성 지역으로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조사,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붙잡혔다. 다른 만세시위 참여자들과 함께 이른바 내란죄 적용 문제로 곧바로 고등법원의 재판에 회부되어 오랜 시간 조사와 법정투쟁을 벌였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죄, 소요죄 등으로 징역 2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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