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炳英
炳英1894. 4. 12 ~ 1954. 11.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광군 영광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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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4년 4월 12일 전라남도 진도군(塵道郡) 진도면(珍島面) 남동리(南洞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전남 영광군(靈光郡) 영광면(靈光面) 도동리(道東里)에 거주하면서, 영광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 해 3월 14일 영광군 영광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영광군에서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던 조철현(曺喆鉉)과 유일(柳一) 등 유학생들이 서울 만세운동을 직접 경험하고, 영광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영광보통학교 교사로, 평소 독립해야 한다는 의식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어서 조철현과 유일이 방문하여 만세시위 계획을 의논하였다. 한편, 조철현 등이 찾아오기 이전부터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만세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르치고 있던 영광보통학교 학생 중에서 독립의식이 투철하다고 여겨지는 정헌모(鄭憲模)·허봉(許奉)·조술현(曺述鉉) 등의 학생을 교실에 모아놓고 만세운동에 대한 내용을 설파하고 그 감상을 물었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학생들이 하루빨리 결의하여 독립운동을 결의하여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동의하였고, 영광군에서의 만세운동을 결행하기로 협의하였다. 이러던 와중에 조철현·유일 등이 찾아와서 만세시위 계획이 급속히 진전되었다. 3월 14일 정오에 영광읍 시장에서 유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영광에서의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영광보통학교 학생 150여 명은 학교 교정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선창한 후, 교촌리(校村里)를 출발하여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영광읍까지 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학생 시위대 가운데에서 이들을 인솔하였다. 영광읍으로 향하는 와중에 군중이 학생 시위대에 점차 합류하여 시위대 규모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남천리(南川里) 정미소를 지나던 중에 일제 경찰과 충돌하게 되었다. 현장에서 시위를 주도한 다른 학생들과 함께 붙잡혔다. 체포된 직후에 일제의 문관분한령(文官分限令)에 근거하여 휴직상태가 되었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 해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뒤에도 일제 치하의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복직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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