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李秉植

秉植

1861. 9. 12 ~ 1938. 5. 7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秉植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기 가평(加平)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가평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가평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61년 9월 12일 경기도 가평군(加平郡) 북면(北面) 목동리(沐洞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5일 가평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가평군 만세운동은 이윤석(李胤錫)·정흥교(鄭興敎)·장기영(張基榮) 등의 천도교계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고종의 장례식에 참례하는 과정에서 서울의 천도교계 인사들로부터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수령한 이규봉(李圭鳳)은 장남 이윤석과 제자 정흥교에게 이를 전달하여, 가평군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이윤석과 정흥교는 우선 장기영 등 30여 명과 함께 동지로 결합하고, 가평읍의 장날인 3월 15일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후 이윤석과 정흥교는 「밀통(密通)」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이 독립할 것이므로 (음) 2월 14일(3. 15) 아침 9시 가평에서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라는 취지의 격문을 작성하여 북면의 각 지역으로 배포하여 많은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15일 아침 일찍 이병식은 이윤석·정흥교 등과 함께 북면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주민들 앞에서 이윤석·장기영 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주민들이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따라 외치며 호응함에 따라, 이윤석·정흥교 등의 동지들과 함께 주민들을 지휘하여 시위 대열을 갖추고, 선두에 앞세운 대형 태극기를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가평군청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가평군청에 도착하자, 곧바로 독립선언식을 개최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읍내의 주민들이 계속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해 왔다. 이때 선두에서 시위대를 지휘하여 공립학교와 군내면 면사무소 등 가평군 읍내의 곳곳을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가평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가평군수와 헌병대장을 비롯한 군내의 일제 관헌들이 모두 출동하여 만세시위의 즉각 해산을 명령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더욱 격렬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저녁 8시경까지 만세시위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대가 해산하기 시작하자, 일제 헌병대는 즉각적으로 만세시위 주도자들에 대한 검거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날은 일제 헌병의 체포를 피해 귀가하였으나, 다음 날 목동리로 출동한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일제 헌병대의 조사과정에서 만세시위의 주도자 중 한사람으로 파악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다. 이에 불복하여 즉각 상고하였으나, 그 해 7월 18일 스스로 상고를 취하하여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