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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진

尹顯振

1892. 9. 20 ~ 1921.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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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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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양산(梁山)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양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동청년당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국민대표회의기성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92년 9월 20일 경상남도 양산군(梁山郡) 상북면(上北面) 소토리(所土里)에서 동래부윤(東萊府尹)을 지낸 윤필은(尹弼殷)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의백(義伯), 호는 우산(友山)이다.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윤현태(尹顯泰)의 동생이다. 어린 시절 고향의 글방인 만성재(晩惺齋)에서 한학을 배우고, 1907년 구포(龜浦)의 구명학교(龜明學校)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1914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에 입학하였으며, 1915년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 총무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16년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 결성에 참여하였다. 신아동맹당은 조선인 유학생 최익준(崔益俊)·하상연(河相衍)·김명식(金明植)·김양수(金良洙), 중국인 유학생 황췌(黃覺)·뤄훠(羅豁)·덩시민(鄧潔民)·셰푸아(謝扶雅), 대만인 유학생 펑화룽(彭華榮) 등과 함께 “아세아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세아를 세우자”라는 목적 아래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였다. 그 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참여하였다. 대동청년단은 1909년 김두봉(金枓奉)·안희제(安熙濟) 등이 결성한 비밀결사로, 대동청년단 단원들은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과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교육기관 의춘학원(宜春學院)과 장학재단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안희제의 백산상회(白山商會) 경영에도 참여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21일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임시사무소(獨立臨時事務所)에 참여하였다. 안희제와 윤현태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 활용하였다. 그 해 4월 13일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재무차장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재정을 담당하였다. 1920년 1월 김구(金九)·손정도(孫貞道)·김철(金澈)과 함께 의용단(義勇團) 조직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그 해 2월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회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할 때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 임시정부 내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퇴진운동이 일어나자, 차장급 인사를 규합하여 대통령불신임안을 내고 총사직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안창호(安昌浩)의 설득과 만류로 사직서를 거두었다. 1921년 2월 박은식(朴殷植)·원세훈(元世勳) 등 14인이 ‘우리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통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소집을 요구하였다. 이 때 개조파의 일원으로 국민대표대회기성회 구성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3월 한국과 중국의 우국 인사들이 서로 협력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한다는 취지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의 중한국민호조사총사(中韓國民互助社總社)에 참여하였다. 활동 중 과로로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결국 1921년 9월 16일 상하이에서 사망하였다. 장례는 임시정부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구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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