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慈海
慈海1900. 10. 22 ~ 1967. 12.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 · 민국독립단
- · 광복군사령부
- · 중국국민당
- ·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주쑤이위안성 초모처
포상 정보
- · 독립장(2007)
관련 사건
- · 경신참변(간도참변)
- · 만주사변
- · 중일전쟁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07) 1900년 10월 22일 평안북도 자성군(慈城郡) 장토면(長土面) 호하동(湖下洞)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동필(李東弼)이다. 손옥성(孫玉成)과 결혼하였으며, 자녀는 이우송(李友松)·이우빙(李友氷)이다. 관립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평안북도 중강진(中江鎭) 소재 공립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지참한 김병현(金秉賢)으로부터 한반도 내 각지의 만세운동 상황을 전해 들었다. 이후 지역의 종교인들과 협의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해 3월 16일 학생들과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연병래(延秉來)·김병현과 함께 중국 린장현(臨江縣) 모아산(帽兒山)으로 이동하여 제2차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국내로 돌아와 항일조직 결성에 착수하였다. 중강진 각 기관과 학교를 담당하여 일제 헌병대 소속 한인 12명을 탈퇴시켰다. 일제 경찰에 조직이 드러나 서간도(西間島)로 망명하였다. 연병래·김병현 등 37명과 함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입단하기로 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3월 13일 조직된 항일 무장투쟁 단체이다. 대한독립단 본부가 있는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로 이동하였다. 류허현 삼원포에서 대한독립단 단장 조맹선(趙孟善)을 만난 후 대한독립단에 합류하였다. 대한독립단 장백현지단(長白縣支團)·팔도강지단(八道江支團)의 현황을 조사하여 대한독립단 본부로 귀환하였다. 이후 대한독립단 의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독립단 팔도강지단 특파대 조직을 건의하고 구호(救護)·의무(醫務) 인원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류허현 삼원포에서 대한독립단과 한족회(韓族會) 통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연병래와 함께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두 단체의 명칭을 취소하고 새로운 단체를 조직할 것을 제시하였으나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직후 대한독립단 주도 세력 사이에 공화주의(共和主義)와 복벽주의(復辟主義) 노선 갈등이 나타났다. 대한독립단은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과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으로 양분되었으며, 이 가운데 민국독립단에 참여하였다. 1920년 대한독립단·한족회·대한청년연합회 등이 통합하여 광복군사령부가 조직되었다. 광복군사령부에 참가하여 군의처(軍醫處) 처장 겸 사령부 기요비서(機要秘書)로 활동하였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무기를 조달하였으며, 청년들과 함께 중국 안둥(安東)에서 장전강(長甸江) 입구까지 무기를 운반하였다. 그해 경신참변(庚申慘變) 당시 광복군사령부 관전현지단(寬甸縣支團)으로 이동하였다가 일본군의 습격으로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이후 콴뎬현(寬甸縣)에서 병원을 개설하였다. 1923년 무렵 중국 베이징(北京) 서북방 하이뎬(海甸)으로 이동하였다. 1924년 하이뎬에서 안창호(安昌浩)·안정근(安定根)·김승만(金承萬)과 함께 농장을 운영하면서 아신병원(亞新醫院)을 개업하였다. 안창호가 소개한 김우경(金又卿)과 함께 베이징 시내에서 진료소를 운영하였다. 서간도에서 함께 활동했던 황해천(黃海天)의 연락을 받고 펑위샹(馮玉祥) 부대에 참여하였다. 펑위샹은 쑤이위안성(綏遠省)을 기반으로 한 군벌로 1927년 4월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총사령으로 북벌(北伐)을 수행하고 있었다. 베이징 소재 제2병원에서 의술과 위생관리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톈진(天津)과 네이멍구(內蒙古) 지닝현(集寧縣) 야전병원에서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직후 따통(大同)에서 항일운동에 관한 글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따통에서 항일무장부대를 조직하려는 계획을 김구(金九)에게 보고하였다. 황하청(黃河淸)·고운기(高雲起)와 함께 창바이현(長白縣)으로 이동하여 항일무장부대를 조직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김구가 보낸 특파원들과 만나 항일운동에 관해 협의하였다. 일본군이 따통을 점령한 후 네이멍구 바오터우(包頭)로 이동하자, 1937년 11월 시안(西安)으로 이동하기 위해 바오터우에서 출발하였다. 그해 11월 말 린허현(臨河縣)에서 중국군에 붙잡혀 일제 간첩 혐의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1938년 3·1운동 감상문을 신문에 게재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그해 4월 24일 풀려났다. 중국군 군의주임(軍醫主任)으로 네이멍구 각지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이 시기 중국국민당에 입당하였으며, 교관으로서 군의관을 양성하였다. 1944년 8월 임시정부 지시에 따라 한국광복군 주쑤이위안성(駐綏遠省) 초모처(招募處)를 설치하였다. 1945년 7월 충칭(重慶)에서 김구가 파견한 이충모(李忠模)를 만나 활동 계획을 논의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바오터우로 이동하여 한인회를 조직하여 한인 보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바오터우 거주 한인 귀국 문제를 중국 정부와 교섭하였다. 김구로부터 함께 환국하자는 서신을 받았다. 바오터우 한인 귀국 문제를 해결한 후 철도병원에서 근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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