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尙祚
尙祚1913. 3. 7 ~ 1945. 9.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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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913년 3월 7일 경상남도 통영군(統營郡) 욕지면(欲知島) 서산리(西山里)에서 태어났다. 일본 도쿄(東京) 소재 릿쿄대학(立敎大學)에서 유학하였다. 1938년 릿쿄대학 재학 중 원용오(元容五) 등과 10여 차례 만나 항일 투쟁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만남에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은 조선의 발전과 향상을 저지하고 영원히 일본의 노예상태로 두어 끊임없는 착취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으로 기독교 탄압과 한글 신문의 폐간, 조선인의 취직 제한 및 그 대우상의 차별 등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동조하고, 이러한 인식에 따라 “조선 민족의 행복은 독립 이외에는 없다”라고 판단하였다. 당시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일본은 국력이 쇠퇴해지고 나아가 조선에 대한 압력이 약화될 것이므로 독립 실현의 시기가 멀지 않다고 보고 지금이야말로 면학에 정진하여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인격 수완의 연마를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결의하였다. 1940년 6월경까지 원용오와 수차례 만나 “조선 독립을 위해서는 조선인에게 독립 정신과 민족적 자각을 환기하고 함양할 것이 중요하며 이는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자금을 모집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조선인 자제 교육에 힘쓰고 나아가 교원을 양성하여 교육에 종사하게 한다”라는 원용오의 계획에 동의하였다. 이에 따라 졸업 후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학교를 세우고 교원을 양성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1942년 3월 릿쿄대학을 졸업하고 도쿄의 한 회사에 취직한 후 재일 한인을 대상으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비밀리에 항일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1943년 4월 귀국하여 형이 경영하는 동방흥약사에 근무하였다. 이때도 역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4년 1월 부산에서 와카야마(和歌山) 경찰 형사대에 붙잡혀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그해 3월 26일 와카야마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그 해 9월 20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최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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