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50. 1. 24 ~ 1906. 4. 2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홍주의병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을미사변
- · 전기의병(홍주의병)
- · 단발령
- · 을사늑약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50년 1월 24일 충청남도 결성군(結城郡) 화산면(花山面, 현 홍성군 구항면)에서 부친 이조익(李祖益)과 모친 광산 김씨의 장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순명(舜命)·순도(舜徒), 호는 복암(復菴)이다. 7세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읽고, 9살에는 족조인 이훈(李壎)에게 소학을, 15세부터는 족형인 이위(李偉)와 덕산의 이돈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에 처하여 조정에서 방책을 널리 구하자 「의상동뇌차(擬上冬雷箚)」를 지었으며, 1878년 「의상척양왜소(擬上斥洋倭疏)」를 올렸다. 1882년 생원시 복시에 합격하였다. 1888년 겨울 알성과 응제시에 합격하고, 1889년 12월 식년시 전시에 합격하였다. 사간원 정언(정6품)에 제수되었다. 1891년 정월 홍문관 수찬에, 그해 6월 서학 교수가 되었다. 1893년 11월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1894년 봄 응교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후에 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일제의 내정개혁 강요를 거부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면서 사임하고자 하였다. 조정에서는 동부승지와 우부승지를 제수하여 임금을 보필하게 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상소를 올려 대책을 건의하였다. 이 상소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한 책임이 정부에도 있음을 지적하고 탐학한 관리들을 탄핵하였다. 우부승지를 사직하고 상소를 올려 일제와의 전쟁을 결행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 상소를 올린 다음 날인 6월 21일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되고 친일내각이 조직되는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895년 8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상소를 올려 이를 ‘역적의 변란’으로 규정하고 성토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척왜론’을 실천에 옮겨 민족을 보전시키고자 하였다. 김복한(金福漢) 등과 함께 관찰사 이승우(李勝宇)를 찾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하였다. 이승우가 끝내 반대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준비하였다. 다음 날인 12월 1일 드디어 김복한을 중심으로 청양(靑陽)의 유생 안창식(安昌植)·안병찬(安炳瓚) 부자, 대흥(大興)의 박창로(朴昌魯) 등이 군사를 이끌고 홍주부(洪州府) 관내에 집결하였다. 김복한이 재차 이승우의 참여를 요구하자 이승우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 관내에 창의소를 차렸다. 이때 의병의 이름으로 각국 공사관에 보내는 장계와 격문을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의병운동의 장래에 대하여 염려하는 안병찬에게 “이 일은 천지가 다하고 귀신에게 질정을 하여 만고에 뻗치고 백세를 기다려도 큰 의리임이 틀림없다”라고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1895년 12월 4일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 만에 이승우가 배반하여 관찰부에 붙잡혔다. 옥중에서 “5백년 예의의 나라와 수십 대 양반의 집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통하고 원통하다. 천운이니 어찌하랴”라는 글을 썼다. 같은 달 30일 김복한 등과 함께 압송되어 홍주를 출발하였다. 1896년 1월 17일 서울에 도착하여 한성재판소의 옥사에 구금되었다. 그 해 2월 23일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나 힘이 모자라 도적을 치지 못하였다. 차마 군부(君父)가 당한 욕을 말한다면 의리상 살아 있을 수 없어서 춘추필법에 따라 붓으로라도 주륙하려는 뜻을 품고 바야흐로 항의하는 장계를 올리고자 하였는데 그 명분이 의거의 당에서 나왔기에 마침내 체포되었다. 죽음이 있을 따름이요. 다른 할 말은 없소이다”라고 밝혔다. 고등재판소에서 장(杖) 8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같은 해 2월 28일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1905년 11월 2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복한과 함께 상경하여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에서 “매국적을 벨 것과 애통의 조서를 내리고 각도 관찰사에게 명령을 내려 군량을 준비하게 하고, 백만의 충의군을 모집하여 끝까지 무력 항전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 일로 경무청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06년 2월 1일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안병찬 등과 협의하여 민종식(閔宗植)을 영수로 한 제2차 홍주의병을 일으키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병이 악화되자 마지막 상소인 「유소(遺疏)」를 작성하여 문인인 이병량(李秉良)에게 올리게 하였다. 같은 해 4월 29일 사망하였다. 문집으로 『복암집(復菴集)』과 『복당창수록(福堂唱酬錄)』이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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