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柱煥
柱煥1854. 11. 23 ~ 1919. 2.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54년 11월 23일 경상남도 거창군(居昌郡) 주상면(主尙面) 연교리(連橋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병수(李秉綬)이고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 李氏)이다. 본관은 합천(陜川)이고, 자는 인팔(仁八)이며, 호는 연호(連湖)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세금 납부를 거부하였고, 1919년 고종이 승하(昇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1905년 3월부터 송병선(宋秉璿)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그리고 스승의 사후에는 동생 이태환(李台煥)과 함께 송병순(宋秉珣)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일제에게 세금을 납부할 수 없다며 세금 납부 거부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거창군수 유상범(兪尙範)에게 호출당하자 “나라가 망하고 국왕이 없거늘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느냐”고 꾸짖었다. 또 “너 같은 친일파는 나의 뜻을 꺾지 못한다”고 힐책하였다. 이 일로 일제 헌병은 강제 연행한 뒤, 억지로 협조문서에 손도장을 찍게 하였다. 이에 격분하여 귀가하자마자 손도장을 찍은 자신의 엄지 손가락을 자귀(나무를 깎아 다듬는데 쓰는 연장)로 잘라 버렸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상복에 하얀 갓을 쓰고 선영에 찾아가서 선조의 유지를 받들지 못한 데 대한 사죄의 뜻을 고하였다. 그리고 1월 31일경 거창군 주상면(主尙面) 사무소를 찾아가 자신의 민적(民籍, 호적장부)을 찢어 불태우고, 다음날 2월 1일 새벽 침류정(枕流亭)으로 향하였다. 침류정은 경술국치를 당해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통곡하였던 곳이고, 유생들이 국난극복을 위해 모였던 장소였다. 이 침류정 벽에 세상을 하직하는 「사세시(辭世詩)」 한 수를 쓰고 자귀로 자신의 목을 쳐 자결하였다. 이때 남긴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라도 임금도 없는 외로운 백성 / 슬프게 바라우는 가련한 마음이로다 / 삼천리 강토가 비록 넓다고 하나 / 칠십 늙은이는 떳떳하게 다닐 수 조차 없구나 / 서산에서 캐는 고사리는 눈에 자주 푸르렀고 / 동녘 바다 솟는 달은 마음을 비추어 밝았도다 / 끝없는 통한을 어디에 하소연할 것인가? / 지하에서 우리 임금 모실 것을 맹세하노라.” 1919년 2월 15일 장례 때 인근 7~8개 군의 지식인들이 모여 ‘조선의사합천이공지묘(朝鮮義士陜川李公之墓)’라는 묘비를 세워 추앙하였다. 또 거창 지역민들은 1924년 성암사(聖巖祠)를 건립하여 배향하였다. 성암사에는 스승인 순국지사 송병선·송병순 형제도 함께 배향되어 애국충절을 계승하고 있다. 또한 1995년 거창군민들이 침류정 앞에 ‘연호이의사적비(連湖李義士事蹟碑)’를 건립하여 그 공적을 기리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