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億俊
億俊1897 ~ 1922. 4. 1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의군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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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22년 사망 당시 24세로, 1897년생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중국 간도 지역으로 이주하고, 북간도 옌지현(延吉縣) 지인사(智仁社) 의란구(依蘭溝)에 거주하였다. 농업에 종사하였고,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의군단)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의군단은 북간도와 연해주의 의병세력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4월경에 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재 이범윤(李範允), 사령관 김영선(金營善), 검사부장 최우익(崔于翼), 검사관 김영범(金永範), 재정부장 강봉거(姜鳳擧), 대대장 허근(虛根) 등이 중심 인물들이었다. 의군단의 전투 부대는 허근을 대장으로 하는 전위대(前衛隊)와 최우익을 총무로 하는 산포대(山砲隊)로 구성되었다. 1920년 (음)7월 담당 임무 중 하나가 무기운반이었다는 점에서 전투부대원으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크며, 전위대 혹은 산포대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군단 단원으로서 일본군과 일제 경찰과 교전함과 동시에 부대에 무기를 공급하는 수송 업무를 함께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 (음)9월 16일 의군단 단원으로 평소 알고 지내던 이응수(李應洙)에게서 제사가 있으니 참여해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이날 이응수의 집에서 석기호(石基浩)·장남환(張南煥)·이원근(李元根) 등을 만났다. 모임에서 장남환은 간도 왕칭현(汪清縣) 소백초구(小百草溝) 상촌 이화여(李化汝)의 집에 잡화상 이동준(李東俊)·박창근(朴昌根)이 머물고 있는데, 이들이 일제의 밀정이기 때문에 살려두면 소백초구에 큰 화가 있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이들은 두 밀정에 대한 처단 문제로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다음 날인 17일 밤 이동준과 박창근을 살해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자금으로 활용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1920년 (음)9월 17일 밤 장남환·장기영(張基永)과 함께 이화여의 집 앞으로 가서 미리 도착해있던 석기호·이봉준(李鳳俊)·이오남(李五南)·황승권(黃承權) 등을 만났다. 이때 석기호와 함께 집밖에서 망을 보면서 밀정 이동준과 박창근이 도망갈 경우 잡기로 하였다. 장남환·이응수 등이 이화여의 집으로 들어가 두 밀정을 포박한 채 밖으로 나왔다. 이후 이들에 대한 간단한 심문을 진행하고 양반골이라고 불리는 산으로 향하였다. 황승권 등이 먼저 가서 파놓은 구덩이에 두 밀정을 구타한 후 묻었다. 이후 장남환·석기호·장기영과 함께 송전곡으로 이동하였다. 다음 날인 18일 다시 모여 이동준·박창근이 소지했던 조끼 8장, 검은색 라탄(ラタン, 籐) 약 40척, 청색 라탄 약 20척, 종이로 만든 조선인용 연초입(煙草入) 3개, 무명 30매, 빗 5개, 흰색단추, 일본 화폐 54엔, 관조(官吊) 400조(吊), 1원 은화 6매 및 잡기장 3권 등을 배분하였다. 하지만 두 밀정을 살해한 사실이 일제 경찰에 알려져 수배 대상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조사를 받은 후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으로 이송되었다. 1921년 10월 19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이른바 강도죄, 살인죄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경심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1922년 1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살인죄와 강도치사죄로 사형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1922년 3월 16일 경성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그해 4월 15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남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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