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宗昌
宗昌1880. 9. 9 ~ 1966. 2. 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법정사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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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5) 1880년 9월 9일 제주도 좌면(左面) 도순리(道順里)에서 태어났다. 평소에 항일의식이 투철한 김연일(金連日)과 교류하면서 항일의지를 키우다가, 1918년 법정사에서 전개된 항일시위에 참여하였다. 법정사 항일시위는 일제강점기 제주도의 항일운동을 대표하는 항쟁이었다. 1914년 경북 영일(迎日) 출신인 김연일은 제주도 안덕면(安德面) 사계리(砂溪里) 출신 승려인 강창규(姜昌奎)와 함께 제주도로 들어와 법정사에 머물렀다. 이때 정구용(鄭龜龍)·장임호(張林虎)·김인수(金仁秀)·김용충(金用忠)·김삼만(金三萬)·강민수(姜敏洙) 등도 경북 영일이나 함북(咸北)에서 건너와 법정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1918년 6월경 김연일(金蓮日)·강창규(姜昌奎)·방동화(房東華)는 산천단(山川壇)에서 항일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법정사를 거점으로 거사 준비를 시작하였다. 방동화 역시 도순리 출신 승려로 1913년부터 경주 기림사(祈林寺)로 출가해 경상도 일대 사찰에서 수행하였으며, 1918년 봄 다시 제주도로 돌아왔다. 김연일은 8월 초 방동화를 선도교(仙道敎) 지도자인 박주석(朴周錫)에게 보내 항일운동 준비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였다. 박주석은 9월 8일 법정사로 찾아와 김연일 등과 항일 무력항쟁을 모의하였다. 김연일은 9월 19일 우란분재(盂蘭盆齋) 행사에 참석한 신도 30여 명에게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설교하며 항일의 기운을 고조시켰다. 김연일은 “왜놈이 우리 조선을 병합하였을 뿐 아니라 병합 후에 관리는 물론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머지않아 불무황제(佛務皇帝)가 출현하여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니 우선 제일로 제주도에 사는 일본인 관리는 죽이고 상인들은 섬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라는 내용의 선동적인 반일 설교를 하였다. 10월 4일 밤부터 다음날까지 모여든 장정을 중심으로 결성된 선동대에 참여하였다. 선동대는 총 33명으로 구성되었다. 김연일은 스스로 자신이 불무황제임을 선포하였다. 박주석은 도대장(都大將), 방동화는 좌대장, 강민수는 우대장, 양남구(梁南久)는 중군대장, 김삼만(金三萬)을 후군대장, 장임호를 모사(謀師)의 직책을 맡아 출동 체계를 갖추었다. 그리고 법정사 주변의 좌면(左面, 중문면)과 우면(右面, 서귀면)의 면장과 이장들에게 “일본 관리를 소멸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하므로 장정을 거느리고 참가하라. 따르기를 꺼리는 자는 군율에 따라 엄벌에 처한다”라는 내용의 격문을 배포하였다. 거사일인 10월 7일 새벽 선봉대는 대장인 강창규·박주석·장임호의 지휘 아래 무력항쟁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화승총 3정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종이 깃발을 내세우며 출정하였다. 먼저 격문을 배포한 마을들을 돌며 함께 봉기할 동지들을 모았다. 박주석과 강창규는 서귀포로의 진격을 포기하고 중문리(中文里)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기 위해 나섰다. 중문리로 향하던 중 강정리(江汀里)와 도순리 사이 길에서 제주성과 서귀포를 잇는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였다. 하원리(河源里)에 이르러서는 지나온 마을마다 지지자들의 동참이 이어지면서 항쟁 대오는 400여 명에 달하였다. 봉기군은 하원리에서 중문리로 향하던 길에서 만난 일본인 고이즈미 키요미(小泉淸身)와 법환리(法還里)로 선교 활동을 가던 윤식명(尹植明) 목사 일행 5명에게 돌을 던지고 곤봉으로 구타하였다. 윤식명 목사와 원용혁(元容赫) 전도사는 사경을 헤맬 만큼 큰 부상을 입었다. 법정사에 머물러 상황을 지휘하던 김연일은 중문 경찰관주재소 습격에는 직접 나섰다. 봉기군은 경찰관주재소장 요시하라(吉原)를 비롯한 경찰 3명을 포박하고 경찰관주재소에 갇혀있던 13명을 풀어주었다. 경찰관주재소 건물에는 불을 질렀다. 오전 11시경 서귀포 경찰관주재소 기마순사대가 총으로 무장하고 공격하면서 봉기군은 사방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때 현장에서 붙잡혔고, 봉기를 주도하거나 참여한 65명과 함께 구속되어 목포검사지국으로 송치되었다. 이들 가운데 31명이 실형을 받았으며, 2명은 재판을 받기 전에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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