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忠圭
忠圭1891. 7. 14 ~ 1919. 4.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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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91년 7월 14일 전라북도 여산군(礪山郡) 피제면(皮堤面, 현 충남 논산시 연무읍 신화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부친은 이은선(李恩善)이다. 1919년 4월 4일 전북 익산군(益山郡) 익산면(益山面) 이리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희생되었다. 1919년 익산군에서는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3·1운동에 호응하여 3월 10·18·28·30일, 4월 4일 등 몇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각 지역에서 물산(物産)이 모이고 사람의 이동이 빈번하던 이리역(裡里驛) 근처 이리시장과 금마면(金馬面) 익산시장 등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같은 해 4월 4일 12시경 익산군 오산면(五山面) 출신의 문용기(文鏞祺)·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을 비롯해 서울에서 유학 중 귀향하였던 중동학교(中東學校) 학생 김종현(金宗鉉)·김철환(金鐵煥)·이시웅(李時雄)·박영문(朴泳文) 등과 함께 이리장터(일명 솜리장터, 현 익산시 인화동 남부시장 인근)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초기에는 3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호응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 일대를 행진하자, 시위대는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장을 지난 시위대는 근처에 있던 오하시농장(大橋農場, 현 익산시 주현동)으로 이동하였다. 오하시농장은 일제가 전북지역에서 수탈한 쌀을 보관해 놓은 대규모 창고가 있던 곳으로, 한국 수탈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놀란 일제 헌병은 오하시농장의 자위단과 소방대원들까지 동원해 시위대를 곤봉으로 구타하고, 갈고리·도끼 등을 마구 휘두르며 만세시위를 제지하였다. 급기야는 칼로 시위대를 공격하고 총격을 가하면서 시위대의 진압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군경의 총격으로 문용기(文鏞祺)·박영문·박도현·장경춘·서공유(徐公有) 등과 함께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러한 익산군 만세시위의 처참함과 6명의 사망자에 대한 사실은 군산의 장로교 선교사인 윌리암 불(William F. Bull 한국명 부위렴)이 미국에 보낸 보고서에 “정한 시간이 되자 그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만세 소리를 듣고 군인들이 공포를 쏘며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막을 수 없었다. 그러자 군인들이 군중을 향해 총을 발포하였고 현장에서 수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동시에 소방대원들이 군중 속으로 뛰어 들어가며 닥치는 대로 곤봉과 손도끼를 휘둘러 많은 부상자를 냈다. 일본 군인 하나가 시위대를 이끌던 젊은이를 붙잡아 연행하려 하자 ‘죄지은 게 없으니 갈 수 없다’고 버텼다. 군인은 ‘그렇다면 여기서 죽일 수도 있다’고 위협하자 머리를 세우고 가슴을 내민 채, ‘죽일 테면 죽여라. 그러나 내 입에서 만세 소리만은 막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군인이 칼을 뽑아 그의 가슴을 찌르자 피를 쏟으며 땅에 넘어졌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세 번 크게 외쳤다고 한다. 그날 현장에서 여섯 명이 살해되었는데 모두 기독교인이다.”라고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한편 자손이 없어 이후 만세시위에 대한 행적이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아, 4월 4일 논산군(論山郡) 강경면(江景面)의 만세시위에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논산시에서는 1981년 6월 연무읍 안심리(安心里)에 ‘순국지사 이충규 현충비’를 세웠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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