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錫朋
錫朋1873. 12. 2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관련 사건
- · 1919년 수안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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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3) 1873년 12월 2일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율계면(栗界面) 금촌리(金村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석명(李錫明), 한자가 다른 이석붕(李錫鵬)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3일 수안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수안군은 천도교 인사들을 통해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 소식이 전달되었다. 천도교인 이경섭(李景燮)이 서울에서 보내진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에 관한 연락을 받았고, 교구장 안봉하(安鳳河)에게 전달하였다. 이로써 안봉하를 비롯한 천도교 인사들은 3월 3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3월 2일 오후 급습한 일제 헌병대가 수안천도교구실을 수색하면서 만세시위 계획이 발각되었다. 이때 현장에서 독립선언서를 압수당하고 안봉하를 비롯한 천도교구 인사들이 연행되었다. 일제 헌병의 체포를 면한 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禎)·한청일(韓淸一)은 계획대로 3월 3일에 수안군 만세시위를 준비하였고,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수안군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 소식을 전해 듣고 이영섭(李永燮)·김정석(金廷奭)·정덕원(鄭德源)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3일 새벽 6시부터 수안군 일대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된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으며, 수안헌병분대로 이동하였다. 오전 11시 경 그리고 오후 1시 무렵 시위대는 수안헌병분대로 진입을 시도하면서 퇴거를 요구하였는데, 이때 일제 헌병의 발포로 인해 현장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 당시 만세시위 현장에 율계면의 주민들과 함께 참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와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현장으로 가던 중, 마주한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진입을 저지당하고 해산되었다. 율계면 주민들과 함께 수안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일제 군경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독립을 위해서 만세를 부른 행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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