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相煥
相煥1897. 4. 17 ~ 1943. 2.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3월 양산군 양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7년 4월 17일 경상남도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 내송리(內松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귀수(李貴守)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엄주태(嚴柱泰)·전병건(全秉健)·박삼도(朴三道) 등과 함께 1919년 3월 27일 양산군 양산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양산지역의 만세운동은 양산면 중부동(中部洞)에 거주한 엄주태(嚴柱泰)로부터 시작되었다. 부산에 갔다가 3월 13일 가까운 친척인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 현 동래고등학교)의 학생 엄진영(嚴進永)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부산의 만세시위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 등의 인쇄물을 가지고 왔다. 이후 동지를 규합하고, 양산의 장날인 3월 27일을 만세시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3월 26일에는 독립선언서를 비롯한 인쇄물을 등사하는 등 시위 준비를 하였고, 이를 목격한 이들로부터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았다. 그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이들과 함께 인쇄물 준비와 ‘독립만세’라고 쓴 현수막을 제작하였다. 3월 27일 많은 주민들이 모인 양산장터에서 오후 1시 30분 경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장터의 주민들에게 배포하고 ‘독립만세’의 현수막을 높이 들고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여기에 장터에 나온 주민들도 곧바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삽시간에 늘어나 무려 3,000여 명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들과 함께 양산읍 시가의 곳곳을 행진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출동한 일제 헌병들이 만세시위 해산을 명령하면서 선두에 있던 주민들을 구타하고, 강제 연행하였다. 이와 같은 무력 탄압에 분노한 시위대를 지휘하여 양산헌병분견소와 양산군청으로 가서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규모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확대되어 가자, 양산헌병분견소장 오카다(岡田)는 연행자들을 석방시키면서 시위대의 해산을 요청하였다. 연행자의 석방을 확인하고 시위대는 안심하고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3월 28일 일제 헌병대는 새벽부터 만세시위 주도자들의 집을 습격하여 엄주태 등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여 연행하였다. 이날은 일제 헌병대의 기습을 피해 다행히 몸을 피할 수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일제 헌병대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곧바로 항소하였다. 같은 해 5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의 일부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여전히 1심 판결과 동일하게 받았다. 그 결과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