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祥和
祥和1871. 5. 10 ~ 1953. 6.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영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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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1년 5월 10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平洞)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이상화(李詳和)가 있다. 1919년 3월 18일 동생 이중식(李仲植)과 함께 영해면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영덕에서 만세운동은 북장로파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이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3월 12일 전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에게 이를 전달하며 규합하였다. 권태원은 송천동(松川洞)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와 함께 시위를 준비하였고, 장날인 3월 18일 영해 성내(城內)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할 것을 결정하였다. 또한 기독교도와 유림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함께 만세시위 참여를 결정하였고, 이들을 도와 마을을 돌며 시위참여와 태극기 지참을 전달하였다. 3월 18일 영해면 장날 정오경에 정규하 등 주도세력이 태극기를 안고 시장 안으로 들어갔으며, 오후 1시경에 영해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사전에 준비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영해보통학교,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공립심상소학교를 행진하며 시위를 하였다. 이 만세시위에 동생 이중식과 함께 태극기를 가지고 영해 장터로 가서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주재소와 보통학교의 기물을 파괴하고 제지하는 순사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영해면의 장날 시위는 병곡면(柄谷面)으로 번져갔는데, 2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오후 2시경 병곡면으로 이동하였다. 병곡면에 이르렀을 때, 400~5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시위대에 앞장서서 주재소와 면사무소에 진입하여 시설을 파괴하는 적극성을 보였고, 주재소는 기둥과 지붕 정도만 남았을 정도로 훼손이 심하였다. 격화된 만세시위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이에 일제가 군대를 증파하여 진압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포로 현장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때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공무집행 방해죄, 건조물 손괴죄, 기물손괴죄, 공문서 훼기죄, 상해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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