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丙文
丙文1888. 1. 20 ~ 1921. 3.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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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88년 1월 20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이성도(李聖道)가 있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의 연합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1일 서울에서 귀향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안성군 양성면의 만세시위가 일어난 이래, 3월 28일부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는 연일 계속하여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만세운동의 흐름 속에서 원곡면과 양성면의 만세시위는 4월 1일 원곡면의 주도로 두 지역에서 2,0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매우 격렬한 연합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원곡면 주민들은 4월 1일 오후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과 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최은식(崔殷植)과 이희용(李熙龍)·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竹栢里), 현 (平澤市) (竹栢洞)의 이양섭(李陽燮) 등의 주도로 원곡면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약 1,000명의 주민들과 함께 이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유석·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외쳤다. 대규모 주민들이 참여하여, 그 기세로 면사무소에서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을 끌어내 그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함께 외치게 하자, 만세시위의 기세는 더욱 고조되었다. 만세시위의 주도자들은 기세를 몰아 과거 한 지역이었던 양성면의 주민들과 연합시위를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이날 밤 이유석 등의 지휘에 따라 시위대열을 형성하여 횃불을 밝히고, 면장 남길우를 선두에 세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의 행렬이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성은고개에 이르자, 이유석 등 주도자들은 일단 시위행진을 멈추고, 만세시위의 분위기를 재정비하기 위해 집회를 열었다. 이유석이 먼저 나서서 “여러분 우리가 서로 기약 없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요. 우리는 양성주재소로 가서 일본순사들을 끌어내어 같이 대한 독립만세를 부릅시다”라고 연설하였다. 이후 홍창섭·이덕순·이근수·최은식 등이 서로 번갈아가며, “대한의 독립국이 생기면 일본의 야만적 식민정책을 수행하던 관청은 필요없소.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앞잡이인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은 모두 때려 부숴야 합니다. 그리고 양성읍내에 있는 일본인도 모두 쫓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활동하시오”라는 내용으로 연설하였다. 이에 주변에서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준비하여 다시 시위대열을 형성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이 위치한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한편, 같은 날 양성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양성면의 주민들은 이날 밤 9시 경부터 수백 명이 모여 일제 경찰의 주재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양성면의 주민들은 원곡면 방향의 성은고개에서 횃불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양성면 쪽으로 행진해 오고 있는 원곡면의 시위대를 목격하고, 이들과 합류하여 2,000여 명의 대규모 시위대로 확대되어 더욱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원곡면 주민들은 양성면의 주민들과 얼싸안고 “이제는 독립이 되었다”라고 기뻐하며, 더욱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이유석 등의 지휘에 따라 가장 먼저 일제 경찰의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주재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투석전을 전개하고, 일제 경찰들이 시위대의 규모에 놀라 도주하자, 불을 피워 일제 주재소 건물 전체를 소각시켰다. 이후 주도자들의 지휘에 따라 일제의 통신기관인 우편소를 습격하였다. 우편소의 주변에 민가가 많았기 때문에 건물은 그대로 두고 건물 안의 집기들을 다 들어내서 불태우고, 전신선을 끊고, 전신주를 넘어뜨렸다. 또 양성면 면사무소로 들어가 호적원부를 꺼내어 소각하고 기물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밤 늦도록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해산하였다. 일제는 4월 3일 조선주차군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 제79연대 30여 명의 군대를 원곡·양성 지역으로 파견하여 4월 1일의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조사·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방화죄 등으로 징역 2년 6월(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일제의 감옥에 수감되어 옥고를 겪던 중, 그해 3월 10일 옥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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