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秉霖
秉霖1889. 6. 4 ~ 1919. 4. 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공주군 정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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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89년 6월 4일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정안면(正安面) 석송리(石松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그 해 4월 1일 공주군 정안면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정안면 만세운동은 석송리의 이기한(李綺漢)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그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존경받는 대표적인 유림 중 한 사람으로, 1910년 국권상실 이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기한은 1919년 3월 1일부터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파악하고, 이에 호응하여 정안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평소 교류가 있던 이병억(李秉億) 등과 논의하여 태극기를 준비하는 등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1일 이기한은 이병억과 함께 석송리의 주민들을 모아놓고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만세운동에 대해 연설한 뒤, 함께 만세시위에 나설 것을 호소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때 이기한의 호소를 듣고 크게 공감하여 수십 명의 주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기한의 지휘에 따라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만세시위 대열을 갖추어 면사무소가 있는 광정리(廣亭里)를 향해 행진하였다. 면사무소로 행진하는 도중 인근에서 모범림의 식수 작업에 동원된 운궁리(雲弓里) 주민 수십 명이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작업에 사용하던 연장을 그대로 휴대하고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시위대가 행진하는 길목마다 곳곳에서 많은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합세하여 광정리(廣亭里)에 도착했을 때 참가자는 800여 명이 넘는 규모가 되었다. 대규모 시위대와 함께 일본인 거주지와 정미소 앞 등 광정리의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주재소를 파괴하자”라는 이기한의 지휘에 따라 순사주재소 습격에 동참하였다. 홍점산(洪点山)·황타관(黃他官) 등의 운궁리 주민들은 지참하고 있던 삽과 곡괭이 등을 이용하여 주재소의 담장을 넘어뜨리고, 유리창을 부수는 등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와 같은 격렬한 시위로 광정리의 순사주재소가 파괴되고 있음을 보고받은 공주경찰서는 긴급하게 순사 이하 10여 명의 병력을 광정리로 급파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만세시위는 이미 마무리되어 모두 해산한 상태였다. 시위 해산 이후 석송리로 돌아와 김원일(金元日)이 경영하는 주막에서 다른 주민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던 중, 광정리 방향으로 출동하는 일제 경찰의 차량을 목격하였다. 이에 즉각 도로로 뛰어나가 일제 경찰의 차량을 막아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상황을 목격한 30여 명의 주민들이 차량을 둘러쌌다. 차량의 진행이 막히자, 일제 헌병은 해산을 명령하면서 진행을 방해하던 중심 인물들을 체포하려 하였다. 이에 체포 시도를 저지하여 “그가 무슨 죄가 있어서 잡아 가느냐”라고 고함을 치며 앞뒤 좌우에서 떠밀고, 저항하면서 포승줄을 풀어주었다. 시위대는 일제 헌병의 대검을 빼앗으려 하고, 체포 시도를 몸으로 막으면서 계속해서 몸싸움을 벌였다. 한인 순사보를 향해서는 “너도 한국사람인데 어째서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라고 다그치면서 구타하였다. 이와 같은 격렬한 저항에 몰린 일제 경찰은 주민들을 향해 일제히 사격하여 상황을 모면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의 총탄에 맞아 다음날인 4월 2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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