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容相
容相1924. 7. 1 ~ 2005. 4. 1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24년 7월 1일 서울 다동(茶洞)에서 태어났다. 천주교를 믿는 가정에서 자랐다. 1942년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부천에 있는 병기공장에 근로동원 되었다가 탈출하였고, 이로 인해 보성전문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1943년 9월 만주 건국대학에 다니던 친구 조명수(趙明壽)와 편지를 교환하다가 검열에 걸려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12월 가미카제(神風)특공대에 지원하겠다는 거짓 혈서를 쓰고 석방되었다. 1944년 9월 16일 징병(徵兵)으로 입대하라는 통지를 받고, 평양사단 예하 치중50부대에 입대하였다. 9월 25일 평양을 출발 중국 산시성(山西省) 윈청(運城)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교육대에 배속되어 신병훈련을 받았다. 중국어를 잘하였던 관계로 일본군 장교의 신임을 얻었다. 훈련 중 중국인 이발사로부터 조선의용군의 「조선동포에게 보내는 격려문」을 받아보았고, 탈출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훈련을 마친 후 윈청에서 후베이성(湖北省) 한커우(漢口)로 이동하였고, 한커우에서 간부후보생이 되었다. 한커우에서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중 후난성(湖南省) 샹장(湘江) 상류 지역에서 강재식(姜在植)·김광수(金光洙)·안담용(安譚鎔)·황의선(黃義善) 등과 함께 탈출하여, 후난성 화스(花市)에서 활동하던 중국군 유격대를 만났다. 동지 4명은 중국군 유격대의 안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重慶)을 향해 떠났다. 중국군 유격대 사령관 쉬동(徐洞)으로부터 심리전을 위한 삐라 작성과 통역을 도우라는 지시를 받고 중국군 유격대에 남았다. 쉬동 사령관으로부터 급료와 급식 제공 이외에도 모든 대우를 중위와 동등하게 해주는 객인(客人)이란 액외중위(額外中尉) 사령장을 받고, 중국군 유격대에서 활동하였다. 중국군 유격대와 함께 일본군 기습 공격에 참여하였고, 일본군을 향한 삐라 작성 등 선무공작 업무를 맡았다.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池靑天)이 충칭으로 보내달라는 전문을 보냈지만, 쉬동 사령관이 아직 시기가 아니라며 미루었다. 1945년 8월 1일 광복군에 참여하기 위해 충칭을 향해 출발하였다. 후난성 즈장(芷江)에 이르렀을 때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즈장에 있던 중국군 제193사단 참모장 왕더롱(王德容)이 일본군 항복 접수를 위해 일본어 통역이 필요하다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충칭행을 중단하였다. 9월 15일 중국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주저우(株州)에서 일본군 독립혼성 82여단의 항복 접수 때 통역을 담당하였고, 중국군이 일본군으로부터 무기사용과 기술교육을 받을 때도 통역을 맡았다. 이때 일본군 측 통역으로 나온 김영주(金英柱)를 만났다. 김영주와 함께 난징(南京)을 거쳐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상하이에서 머물다가 1946년 4월 30일 상하이 제2부두에서 수송선을 타고 부산을 통해 5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정훈1기생으로 국군에 입대하였고, 1955년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국방부 보도과장, 공보부 공보국장, 서울국제방송국장, 한중예술연합회 회장,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상임이사 등을 지냈다. 저서로 『분노의 계절』, 『분노의 태양』, 『분노의 대륙』, 시집으로 『아름다운 생명』, 『내가 만든 사막』 등이 있으며, 회고록 『삼색의 군복』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한시준⋮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